미 의회 연단에 서는 교황…
"정치적 메시지 나오나" 워싱턴 긴장
오는 22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워싱턴 D.C. 방문을 앞두고 미국 정치권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교황의 방문 자체는 국가적으로 경축할 만한 일이지만, 평소 미국과 자본주의에 부정적 인식을 표출해온 교황이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논쟁적 메시지를 던질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는 특히 이민자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놓고 논쟁이 불붙은 미국 대선 경선판에 예기치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교황, 상·하원 합동연설서 '정치적 메시지' 예상 = 미국 워싱턴 정가가 가장 눈여겨 보는 교황의 방미 일정은 24일로 예정된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이다. 교황이 미국 의회 연단에 서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주목할 대목은 이 연설이 '종교적 연설'이 아니라 사실상의 '정치적 연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종교를 떠나 미국과 자본주의, 그리고 전 지구적 이슈들을 바라보는 교황의 인식과 그에 터잡은 메시지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타전되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폴리티코는 10일(현지시간) "교황은 영리하고 정교한 정치인임을 스스로 증명해왔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런 면을 이해하는 것이 그가 미국 정치에 주는 복잡한 영향을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이라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대주교를 지낸 교황은 평소 미국 정치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워싱턴'과 '월 스트리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야만적 자본주의'(Savage Capitalism)라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이익만을 최우선시하며 인간성을 배제하고 착취를 일삼아온 현대식 자본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다.
교황은 지난 7월 파라과이 사회 지도층 인사 등 5천여 명과 만난 자리에서 "우상 숭배와 같이 맹목적이고, 인간의 생명을 '돈의 제단'에 희생시키는 경제 모델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물론 늘 약자의 편을 대변해온 역대 교황들 역시 자본주의의 병폐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강경'하지는 않았다는게 미국 언론의 분석이다.
그렇다고 교황이 좌파이념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티코는 "교황은 마르크스주의자임과 동시에 반동분자"라며 "교황은 어느 특정 정치이념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교황은 2013년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내 인생 속에서 좋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많이 알아왔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교황은 젊은 시절 19년간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에서 활동하면서 현대식 자본주의 병폐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대해서는 일반 중남미인이 느끼는 비판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민주주의와 종교적 다원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중남미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과소비로 지구 온난화를 부추기며 빈곤과 폭력을 피해 국경을 넘어오는 이민자들을 봉쇄했다는 인식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폴리티코는 "교황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에 혹독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며 "교황은 자신의 일이 고통 받는자들을 편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편한 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4위의 카톨릭 국가인 미국이 교황 취임후 15번째 방문국으로 밀려난 것도 교황의 이 같은 부정적 인식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올해 78세인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다. 뉴욕타임스는 '교황이 미국을 78년간이나 피하다가 이제야 방문한다'는 제하의 5일자 기사에서 "교황은 강자나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78세가 되어서야 스스로를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경제적 거인(미국)을 방문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민자 포용 메시지…'트럼프 돌풍' 제동 걸릴까 = 이번 교황의 방문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는 쪽은 공화당이다. 일반 유권자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리는 교황이 평소의 지론대로 진보적 가치를 설파할 경우 공화당 대선 주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이 끼쳐질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교황은 동성결혼과 이혼, 낙태 등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카톨릭 내부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다.
특히 교황은 이번 방미기간에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설파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교황의 부친은 1929년 이탈리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온 이민자다.
이는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에게 '철퇴'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비롯한 공화당 일부 대선주자들의 행보와 정면 배치된다. 트럼프 후보는 멕시코 출신 미등록 이주민을 "강간범" "마약상"에 비유하는가 하면, 불법 체류 외국인을 국외로 추방하고 불법 입국을 막기 위해 국경에 높은 차단벽을 세워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펴왔다.
이에 따라 정치권 일각에서는 교황이 이민자와 관련한 메시지를 내놓을 경우 '트럼프 돌풍'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시리아 난민수용자 문제를 놓고 소극적 태도를 보여온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날 난민을 최소 1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며 교황 방미를 앞두고 일찌감치 '선수'를 쳤다.
◇D.C.-뉴욕-필라델피아 잇는 마라톤 일정 = 쿠바를 나흘간 방문한 뒤 22일 워싱턴D.C.에 도착하는 교황은 모두 6일간의 방미 일정을 소화한다.
교황은 22일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 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오바마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은 뒤 23일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고 미국 최대 가톨릭 성당인 워싱턴 바실리카 국립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이어 24일에는 미국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워싱턴 도심에서 성당이 운영하는 노숙자 시설을 방문하는 등 서민행보를 펼칠 예정이다. 이어 뉴욕으로 이동해 성 패트릭 성당에서 열리는 철야기도회에 참석한 뒤 25일 유엔 총회에서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연설을 할 계획이다. 또 9·11 국립기념박물관에서 열리는 다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미사를 집전한다.
필라델피아로 이동하는 교황은 26일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27일에는 3년마다 열리는 세계 천주교가족대회 가두행진에 참석할 예정이다.
◇교황, 미국인들 사이 인기…행사 입장권 동나 = 교황의 미국 내 인기는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 천주교가족대회 행사 입장권 만장이 지난 9일 온라인 신청을 시작한 지 단 30초만에 동이 났다. 당초 무료였던 이 입장권은 현재 온라인을 통해 1장당 수백 달러에 팔리는 품귀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뉴욕 맨해튼 중심가 빌딩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상한 모습을 담은 세로 69m, 가로 28m의 초대형 벽화가 등장했다.
미국 정부는 교황의 방미기간 가톨릭 신자는 물론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릴 것으로 보고 연방정부 공무원들의 재택근무를 권장했다.
교황은 오는 23일 백악관 면담 일정을 마치고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교황전용 차량을 탄 채 퍼레이드를 할 예정이어서 엄청난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 언론 가운데 타임워너 케이블은 교황의 방미일정이 끝나는 27일까지 전용채널을 통해 24시간 교황 관련 소식을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