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장(2) 제자들 임명과 파송

by wgma posted Sep 13, 2015 Views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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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2) 제자들 임명과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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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가야할 길을 구체적으로 명하셨다.

(1)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라,

(2)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3)오히려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복음은 진리다. 이 진리를 증거 함에 있어서 그 첫 번째 대상이

(1)이방인도 아니요,

(2)사마리아 사람도 아니요,

(3)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자들이라 하신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 본래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으로 12족속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런 야곱의 족속을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남쪽은 유다 족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때 국호를 유대라 한 것이고, 북쪽은 11지파 반(베냐민 반 지파)은 이스라엘이라 국호를 정해서 그때부터 북조를 이스라엘이라 했다.

 

그리고 북쪽의 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북쪽이 패망당한 후 이스라엘이란 명칭 대신에 사마리아란 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방의 길로도,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집으로 가라? 그래서 이 말은 유대를 두고 한 말이고, 잃어버린 집은 진리를 떠난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사실 유대인들은 철저한 율법과 규례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고 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도권 안에서 도식(圖式)에 따른 전통이었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신의 뜻을 따라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이런 부분들을 지적해 온 것이다. 가령 ‘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 한다’(호6:6)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라’(사1:10-14 참고) 이런 말씀들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였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도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유다, 사마리아, 땅 끝까지로 되어 있다. 문제는 지금이다. 제도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제도권의 전통을 따른 믿음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믿음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제도나 전통에 묶여 믿는 믿음은 사실상 죽은 믿음인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집이란 뜻이 바로 유대인들, 다시 말하면 전통 믿음을 지켜 산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첫째 대상이 되어야 할까? 이것은 신자들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사역내용에 대해서 말씀 하셨다. 가면서 전파할 내용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다’(눅17:20-21) 이런 말씀들을 두고 많이 오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이 천국의 진입은 불가능 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천국(Heaven)이나 하나님 나라(Kingdom)는 다음과 같이 구별 할 수 있다.

 

Kingdom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그 나라’를 두고 한 말 이고, 천국(Heaven)은 Kingdom이 지상에서 끝나고 백 보좌 심판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 질 영원한 그 세계를 두고 하는 말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1)병든 자를 고치며,

(2)죽은 자를 살리며,

(3)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며,

(4)귀신을 쫓아내라,

 

전도자에게 이런 주제들은 육신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영적인 것에 더 깊이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실 수많은 영혼들이 병들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고(엡2:1), 나환자이고, 귀신들린 사람들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곧 예수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다.(요 1:14, 딤후 3:16-17 참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돈을 생각하고 전도자가 되려는 자는 없겠지만, 요즈음에는 직업으로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분들도 많은 세상이다. 그래서 전도자에게는 물질에 관해서는 초월하기를 다음 절에서 경계사항으로 지목해서 가르친다.

 

다음에는 금지 사항을 명하셨다.

(1)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2)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3)이는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대나 주머니(Bag)는 돈이나 필요한 물품을 넣어두는 자루나 혹은 돈주머니를 말한다. 장사꾼의 저울추나 금, 물맷돌 등을 넣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는데(신 25:13; 사 46:6; 삼상 17:40; 미 6:11) 종종 죄악이나 공평치 못한 사람들의 이기적 속성을 지적하는 비유로 쓰이기도 했다(왕하 5:23; 사 3:22 참고).

 

헬라어에서 전대나 주머니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은 ‘발란티온’(ballantion,눅 10:4; 12:33)이며 ‘글로쏘코몬’(glossokomon, 요 12:6; 13:29)은 돈 상자, 성전세를 내는 궤, 언약궤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 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용례는 여행용 자루나 배낭, 식량 주머니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Staff)는 걸음을 돕기 위해 짚거나 신변의 보호를 위해서도 사용하는 막대기를 말한다. 나무나 갈대로 만들었고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달랐다(민 17:8; 왕하 18:21; 마 27:29). 지팡이는 성경에서 여행자의 물품, 노인의 휴대물품, 목자의 도구, 권위의 상징,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의 상징으로 언급되었다.

 

지팡이에 대해서

1)여행자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있다. 이것은 여행자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창 32:10; 38:18; 출 12:11; 마 10:10; 막 6:8; 눅 9:3). 여행하던 사람들은 걸음을 돕기 위해 또는 방어용으로 지팡이를 사용했는데 고대에는 강도의 출현이 잦았기 때문에(삿 9:25; 눅 10:30) 방어용의 지팡이는 여행자들이 갖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신약시대 여행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바울도 언급하였다(고후 11:26-27).

 

2)노인의 지팡이가 있다. 이것은 기운이 부족한 노인들이 보행을 돕기 위해 사용한 막대기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예루살렘이 회복될 때에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장수하여 지팡이를 잡은 노인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글에서 언급되었다(슥 8:4).

 

3)목자의 지팡이도 있다. 목자들은 양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잘 돌보아야 했고(겔 34:12; 눅 15:4-6)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는 양을 야생동물이나 도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야 했다(삼상 17:34; 사 31:4; 암 3:12; 요 10:15). 목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약 2m 정도나 되는 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이 지팡이는 무리에서 이탈된 양을 돌아오게 하는데 사용되었고(레 27:32; 시 23:4) 맹수를 격퇴시킬 때에도 사용되었다. 맹수를 격퇴할 때 쓴 지팡이는 끝에 못과 같이 날카로운 것이 달린 것이었다고 한다(삼상 17:34-35; 시 23:4).

 

4)권위의 지팡이도 있다. 지도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지팡이를 말한다. ‘치리자의 지팡이’(창 49:10)로도 불리는 이 지팡이는 백성의 귀인들이 잡은 것이며 지도권의 상징이었다(민 21:18).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표시했던 것은 왕권의 상징인 왕의 홀이었다. 홀은 왕이 손에 잡는 짧은 지팡이였고 금, 옥 등의 재료로 만들었다(에 4:11; 5:2; 8:4; 암 1:5, 8; 슥 10:1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도전했을 때(민 16:1-3)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 족장들의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증거의 장막 안에 놓아두게 했다(민 17:1-7). 이 지팡이들 중 오직 레위 지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렸다(민 17:8). 이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세운 진정한 제사장이 아론임을 나타내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또한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로 모세가 잡고 이적과 능력을 행했던 지팡이를 들 수 있다. 원래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였던 모세가 잡았던 것(출 3:1; 4:2)으로 모세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할 때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다(출 7-11장; 14:16).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낸 지도자가 모세임을 증명하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출 4:1-5).

 

5)하나님의 능력과 심판의 상징인 지팡이도 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쓰이는 것을 말한다(욥 9:34; 사 10:5, 15). 개역성경에서 ‘하나님의 막대기’(사 10:5, 15)로 언급된 앗수르는 하나님이 범죄 한 나라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능력과 심판을 상징한다.

 

왜 전도여행을 떠나보내면서 최소한의 여행에 필요한 것 까지도 금하셨을까? 물질에 의존하면 하나님 쪽 보다는 물질 쪽에 훨씬 관심이 더 가도록 되어 있다. 왜하면 물질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진리)을 상품으로 돈을 챙기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신약백성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전도자의 삶)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고, 땅에 속한 삶(육신에 관한 문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을 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신 말씀이다. 누구에게 마땅히 받는 것인가?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받는다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물론 사람의 손을 통해서 공급 받는 것이지만, 결재자는 하나님이란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의 봉급을 받는 것은 경리 담당 직원을 통해서 지급받는 것이지만, 그 결재는 사장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서 수고의 대가를 받으려 하는데 있다. 이렇게 될 때는 그는 삯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외견상으로는 좀 애매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본인과 하나님만이 판단하는 영역이란 것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그 나라를 구하는 일에만 충실한 삶일 때, 그가 세상을 사는 사람과 구별된 삶이라 할 수 있다.

 

전도자로서의 어디를 가서 무엇을 전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1)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면 너희가 머물 합당한 집을 찾으라,

(2)그리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그곳(한곳)에 머물라,

(3)그 집에 들어가면서 반드시 평안하기를 빌라, (너희가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그 평안이 거기 머물 것이요,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로 돌아올 것이다.)

 

여기서 평안(Peace)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평강’과 ‘평화’, ‘평안’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다. 예수님은 옥합을 깬 여인과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고 말하셨는데, 이것은 죄 용서와 치유의 결과로 임하는 종말론적 평화의 성취를 의미하며, 구원과 평안이 같은 의미임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70인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마 10:12-13)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고별의 상황이다(요 14:27; 16:33; 20:19, 21, 26).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위로하셨다. 비록 예수님께서 떠나가시지만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모든 것을 생각나게”(요 14:26) 하실 것이기에 근심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요 16:33) 성도들이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해도 담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절들인 까닭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그리스도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똑같이 적용되었다(마 18:5-6).

 

‘영접하는 자’의 의미로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파라람바노’(paralambano)는 ‘누군가의 삶을 붙들거나 잡는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그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 날(Day of judgment)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행악자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실 마지막 날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말한다(마 16:27; 행 17:31; 롬 2:16). 예수님은 심판 날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다(마 10:15; 11:22-24; 12:36-42; 눅 10:14).

 

심판 날(벧후 2:9; 요일 4:17)에 대해서 살펴보면

(1)여호와의 날(사 2:12; 13:6-9; 욜 2:1, 11, 31; 3:14; 암 5:18; 습 1:7-10; 스 14:1 말 4:5; 행 2:20; 벧후 3:12; 계 6:14), 주의 날(고전 1:8; 5:5; 고후 1:14; 빌 1:6; 살전 5:2-3; 살후 2:1-2; 벧후 3:10),

(2)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3)그 날(딤후 1:12, 18; 4:8; 히 10:25),

(4)권고하시는 날(벧전 2:12)로도 표현되었다.

소돔(Sodom)에 대해서는 가나안의 골짜기의 다섯 성읍 중 하나(창 10:19)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 거주하였던 땅이다(창 13:12).

 

아브라함 당시 소돔을 다스리던 왕은 베라였는데(창 14:2) 조공을 바쳤던 그돌라오멜 왕을 배신하고 사해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창 14:1-11). 그때 소돔에 살던 롯은 가족이 사로잡히고 재산도 빼앗겼지만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창 14:12-16).

 

소돔에 살던 사람들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다고 기록되었다(창 13:13). 소돔의 타락상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한 천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은 소돔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한 예가 된다(창 19:1-11).

 

하나님이 극도로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창 18:22-33). 결국 소돔에는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과 불로 멸망하였고(창 19:24-25) 아브라함의 중보로 롯만 두 딸과 함께 살아남았다(창 19:29-30). 멸망하여 흔적도 없는 소돔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사해 어느 부분일 것으로 추정한다. 소돔의 위치를 사해 남부 수심 1.8m 부근으로 보고 있다.

 

남색을 의미하는 영어 ‘소도미’(sodomy)는 성적으로 문란했던 소돔에서 파생한 단어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사 3:9; 렘 23:14; 마 10:15; 유 1:7; 계 11:8).

 

특히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요13:20) 지상나라에서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보낸 특사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나라의 대통령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사를 거부할 때는 그 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하는 사태가 발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러한 것이다.

 

2) 전도자는 미움과 박해(핍박)를 받는다(10:16-23, 막13:9-13, 눅 21:12-17).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전도지를 향해 가는 길에서 겪어야 하는 아픔들을 미리 말하신다.

(1)너희를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

그러니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진리를 확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격적인 사람들이 되기 쉽다. 그리될 때 전도자는 훨씬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전도자가 순결해야 할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든 약점을 잡히면 그는 더 이상 전도를 할 수 없게 된다.

 

비둘기(Dove)는 목(目)에 딸린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비둘기의 특성 중 하나는 어미 새가 가져온 먹이를 새끼에게 직접 먹이지 않고 어미 새가 먹이를 섭취하여 소낭에서 분비되는 것을 새끼 입에 넣어 주어 키운다는 것이다. 비둘기는 팔레스타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새로 먹을 수 있는 새였으며(레 11:13-19) 사람들에게 사육되기도 한다. 또한 노아 홍수가 끝났을 때 물이 줄었는지 여부를 알고자 방주에서 내보내진 새였다(창 8:8). 또한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며(마 10:16) 성령을 상징하는 새로도 나타난다(막 1:10; 눅 3:22; 요 1:32).

 

제물로 사용될 때 비둘기는 제사에 쓰여지는 데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로 사용되었다(레 5:7; 12:8; 눅 2:24).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산모의 정결예식을 행할 때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눅 2:24).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도 사용된 새이다(창 15:9).

 

순결(Pure, Purity)이란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물이나 사람이 순결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성막에서 사용하는 기름은 순결한 것이어야 했고(출 27:20) 시편 기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사람의 눈을 밝게 한다(시 19:8; 시 12:6 참고)고 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비둘기같이 순결할 것을 요구하셨다(마 10:16).

 

(2)사람들을 삼가라,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뜻이 있다. 전도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건데, 사람을 조심하라니? 전도는 먼저 탐색이 필요 할 때가 있다. 일방적인 공격으로 기득권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미움을 받아 공회로 넘겨지고, 채찍을 맞을 수도 있다.

 

(3)또는 나로(복음 증거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 사실 바울 같은 경우는 실제로 이런 경험을 했다.

 

(4)너희를 넘겨 줄때에는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9-20)

 

이 말씀들이 성경인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한다. 여기서 지금의 교회구조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해 왔는데, 사실 지금의 교회 시스템의 약점이 사람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도록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왜 이런 것이 약점이 되느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교사(선생)는 성령이라고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4:15-17, 26) 그런데 사람이 교사가 될 경우는 참교사인 성령이 활동을 못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믿는 분이라면 답으로 말해 주 었으면 좋겠다. 사람인 교사의 지식이 우월할까, 성령의 지식이 우월할까? 고린도 전서 1장 25절을 읽고 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전통적 상식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심령 골수를 쪼개고도 남음이 있는, 이한 날선 검 같은 성경(히 4:12)을 근거한 하나님의 계시 활동(성령의 조명)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21-) 세상에 이런 비극적 사건이 어디 또 있을까? 하지만 복음(진리)이 증거 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 왜 진리를 전해 주는데 사람들이 미워할까? 왜 그럴까? 이것은 진리기 때문이다. 앞 절에서도 언급 된바와 같이 진리가 증거 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분쟁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보편적 언어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언어’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주제란 걸 주목했으면 좋겠다.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각 사람이 성령의 충만 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4)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신 언어는 ‘다른 언어’였다. 이 말을 잘못오해해서 방언이라 하여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무슨 소리를 내는데 의미도 모르고 귀신의 소리를 내는 것을 성령의 은사로 받은 방언이라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여기의 ‘다른 언어’란 전통유대교의 언어가 아니고, 신약시대의 복음의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이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죽이고, 사도들이 복음 증거 하는 곳에 나타나 훼방하고, 핍박했는가?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이방의 지대들을 다니면서 복음 증거 할 때 유대인들이 왜 이를 갈면서 쫓아다니면서 죽이려 했는가? 그것은 유대교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 개혁자들의 경우에서 똑같이 나타난 현상이었다. 루터가 바덴 베르그 교회 정문에 내건 95개항의 공개 질의는 전통 중세 가톨릭의 언어가 아니다. 개혁 전 개혁자들이 중세교회로부터 투옥을 당하고 화형을 당한 것은 그들의 언어가 중세교회가 쓰는 언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교회들이 쓰는 언어가 아닌 말을 할 때는 당장 이단 삼단 자 취급을 하고 왕따를 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미래 교회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언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요즈음 개혁이란 말이 이곳저곳에서 유행처럼 나타나는데, ‘다른 언어’를 말하는 이단자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새로운 Paradigm도 창출될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교회를 두고 근심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

 

3) 두려워하라(24-33)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 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세상은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어진 말로 본문을 말한다.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 하도다. 한 말은 예수께서 세상으로부터 핍박받는 대우를 받거늘 너희들인들 피할 수 있겠느냐? ‘집 주인을 바알세불(사탄의 주인)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복음의 주인 된 나를 사탄의 왕(바알세불은 사탄의 왕이란 뜻)이라 하였거늘 그 집 사람들이 된 너희를 귀신들린 자들이라 하지 않겠느냐? 이게 사실 기막힌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사실상 사탄의 회가 되어 있었다(계2:9). 처음부터 유대교가 사탄의 회가 된 것은 아니다. 정통성(正統性)을 갖고 4백년의 구속사를 이끌어 온 유대교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변해서 사탄의 회당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들은 전통적(傳統的)으로 내려온 역사성의 인식만 갖고, 자기들은 절대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웬 나사렛의 무식한 목수 출신 녀석이 나타나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미혹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고, 이런 기적 같은 사건들을 보면서 예수는 곧 사탄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생각 한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저희들이 사탄의 회당이 된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이가 오셔서 사탄의 지배아래 있는 백성을 해방시키려고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두고 사탄의 주인 바알세불이라고 몰아세운, 살기가 등등한 세력, 그들을 대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 사방을 다니면서 전도도하고 병도 고쳐 주라고 하신 분이었기에 이것은 불을 보듯 유대인들의 성난 모습이 그림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것이라 한 것이고, 당연히 핍박이 올 터인데, 두려하지 말고,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믿음을 지키라고 당부를 하신 것이다. 여기서 21세기 교회 상황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일까? 혹 유대교처럼 사실은 병들어 변해 있는데도, 전통적 역사성에만 매 달려 새로운 메시지에는 눈을 감거나, 유대인들처럼 핍박을 하는 건 아닐까? 돌이켜 생각하고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5백 년 전, 개혁자들에게 보여 주셨던 계시는 21세기에 이르면서 발전(점진적 계시)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위험하고 듣기 싫은 소리 일수 있다. 지금 교회 상황은 5백 년 전에 만들어졌던, 목회방식, 선교방식, 조직구조, 교육방식 등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내려 왔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왔다. 여기서 명심해야 한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 조직구조나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 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 하리라’

 

왜 파송을 앞에 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을까? 지금 제자들은 전도자들로 파송 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겪어야 할 가진 핍박에 대해서도 언급 하셨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현장에 뛰어 들었다가 상상을 초월할만한 고난과 핍박이 임했을 때, 예수의 보내심을 부인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두려워할 대상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성도는 죄를 두려워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할 내용이 있다.

(1)하나는 바알세불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2)그리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명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바알세불(Beelzebul)은 구약에 등장하는 에그론의 신 즉 팔레스타인의 토착신인 바알세붑(‘파리들의 주’-왕하 1:2-3)과 동일한 신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사탄(마 12:27; 막 3:22, 26; 눅 11:18)이나 귀신들의 왕과 동일시되고 있다(마 12:24, 27; 막 3:22; 눅 11:15, 18 이하). 예수님 당시 이 단어는 ‘그 집의 주인’으로도 이해되었던 것 같다(마 10:25).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결국 지옥에 형벌을 받게 될 악한 사단과 불신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한번 태어나서 두 번 죽(죄 값으로 육은 흙으로, 불신자의영혼은 지옥으로)을 인생들이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나서(육, 거듭나는 것) 한 번 죽을(죄 값으로 흙으로 돌아갈 육체)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한번 태어나 두 번 죽을 것인가?즉 육신은 죄값으로 영혼은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두 번 태어나서(육으로 한번 태어나고 또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한 번 죽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4) 검을 주러 왔다(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Cross)는 고대 페르시아나 애굽, 앗수르에서 죄수를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을 말한다. 페르시아 사람들에 의해 로마에 전해졌고 노예나 죄수를 사형에 처할 때 흔히 사용되었다.

 

십자가의 모양은 두 개의 막대기를 교차시킨 X자형, T자형과 두 개의 막대기 중 긴 세로의 막대기가 짧은 가로 나무 막대 위로 튀어 나온 십자 모양의 형태가 있었다. 예수님은 세 번째 모양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셨다. 그 튀어 나온 부분에는 죄목이나 죄수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마 27:37).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 나무에 못 박아 고정시켜 매달려 있게 하였다. 이렇게 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고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더구나 죄수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기 전 심한 채찍질도 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며칠을 보내며 죄수들은 서서히 십자가에서 죽어갔다.

 

한편 십자가의 처형 방법은 너무 가혹하고 치욕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신 21:22-23, 갈 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으며 십자가의 극한 고통과 수치를 참으셨던 것이다(마 27:32-44; 눅 23:26-43; 요 19:17-24). 그래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속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전 1:17이하; 갈 6:12; 엡 2:16; 골 1:20; 2:15).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명령하셨다(눅 9:23).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예수는 평강의 왕(사 9:5)이라 했고,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천사들이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했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의 육체로 허시고...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신 화목 제물이라 하셨다(엡 2:13-18).

 

그런데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고, 가족끼리 불화하게 하고, 원수가 집안 식구가 되고(눅 12:49-53)라고 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일관성이 전혀 없는 말씀들이 아닌가? 얼핏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혼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은 보편적 인간들의 수평적 질서개념에서 이해를 하려할 때 혼동하게 되고 좌왕우왕한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보편적 질서를 따라서 오신 분도 아니고, 인간들이 형성해 놓은 가치의 기준으로 인식하려 해서도 안 되는 분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보편적 질서를 초월하신 분으로 인간들의 뒤틀려진 가치와 질서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것이 죄에 관한 것이다. 기본이 잘못된 터 위에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아름다운 집을 짓는 다고해서 인간이 행복해 질 수는 없다. 그것은 돌이어 재앙이 될 뿐인 것이다.

 

예수가 오신 것은 이런 인간세계의 가치기준에 맞춰 평화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를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가족들의 잘못된 생각을 적당이 덮어가면서 회칠한 무덤처럼 화평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수술 칼을 들어서라도 가족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다른 것이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임이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40-42/ 막 9:41)

 

전도자는 자기 개인의 철학이나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당연히 그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결과가 된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이 말은 보냄 받아온 전도자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를 그렇게 영접하는 자는 그에 상응하는 상을 결코 잃지 아니 할 것이라는 약속된 말씀이다.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서 가정 안에 가족을 통해서 화평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무슨 의미인가? 복음이 검과 같이 예리하게 심령들과 영혼을 공격하는 검과 같은 것이다. ‘성령의 검’(엡 6:17)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검과 같이 심령들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했다. 말씀의 검은 보이지 않지만 예리하다. 마음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래서 가정에 복음이 들어가면 가족들 중에 분쟁이 일어나고 화평이 깨어지게 된다. 결국 가정의 구조가 달라진다. 오늘날 가정과 같은 교회당에 모이는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지게 된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아 진리 안에 사는 사람과 복음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가족들과는 영적전쟁이 가정 안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종교인이냐 혹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냐에 따라서 영적전쟁이 가정에서 일어나게 된다.

 

5) 상 받을 사람(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영접(迎接, Meet)이란 귀한 손님을 맞이하려고 뛰어나가는 우호적인 주인의 태도를 말한다(창 18:2; 삿 4:18). 또는 어떤 사람을 인정하거나 환심을 사려고 맞이하러 나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삼하 19:20). 그러한 만남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것이다.

 

헬라어 ‘데코마이’(dechomai)의 첫째 의미는 ‘받다’이다. 예컨대 편지, 선물, 급료 등을 받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의 용법은 ‘환영하다, 환대를 베풀다’라는 의미에서의 ‘받아들이다’이다. 마태복음 10:40 이하에서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절들인 까닭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그리스도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똑같이 적용되었다(마 18:5-6).

 

또한 헬라어 ‘아판테시스’(apantesis)는 중요한 방문자들에게 베푼 공적인 환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환호하면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영접하는 자’의 의미로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파라람바노’(paralambano)는 ‘누군가의 삶을 붙들거나 잡는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그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냉수(cold water)는 차가운 물을 말하는데 잠언 기자는 충성된 사자를 냉수에 비유했다(잠 25:13). 이것은 충성된 사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더운 여름날 추수하는 일꾼에게 주는 냉수와 같이 기쁨을 준다는 의미이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같다(잠 25:25)고 했는데, 이는 기쁘고 좋은 소식임을 시청각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냉수 한 그릇의 결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마 10:42)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주 작은 사랑도 분명히 보상받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복음 전하는 자들을 영접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따라서 상급의 문제가 따르게 된다. 여기서 상(賞)은 세상적인 복 받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누구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가? 복음은 전하는 자의 이름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내용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느냐 혹은 그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자들을 환영하는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에 대한 상급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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