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1)
(마태 11:1-19)
마태 11장에서부터 제2기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으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마찰이 서서히 시작된다고 어떤 주석가들은 언급하기도 했다. 본 장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서 기록되어 있다.
(1) 1-19절까지는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고,
(2) 20-24절까지는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자들에 대한 책망을 하시고,
(3) 25-30절까지는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대한 초청으로 되어 있다.
1. 전도하시려고(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1-)
제자들을 임명하고 파송하는 목적은 전도인데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 전도를 하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을 임명하고 파송한 후에 예수님 자신이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기 위해 장소를 옮기신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세 가지 사역의 내용을 마태 9장 35절에서 밝히고 있다. 전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1)첫째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2)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3)셋째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신 것이었다.
전도(Preaching)는 복음을 전하는 것,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마 11:1; 눅 4:44).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전한다’는 뜻이 담긴 헬라어 ‘유앙겔리조’(euangelizo)는 원래 결혼 소식을 전하거나 또는 전쟁 승리의 소식을 전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였다. 그것이 신약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신들의 활동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부르셨으며(마 4:19)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전도하는 것이었으며(마 11:1; 막 1:38-39; 눅 4:44) 또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셨다(막 3:14).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도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셨다(마 28:19-20; 행 1:8).
예수님의 말씀대로 초대 교회는 언제나 전도하는 교회였으며(행 8:4)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전도하였던 사람이었다(행 20:24).
데이빗 왓슨의 전도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복음을 믿으라”(마 3:2; 막 1:15)고 외치셨다. 제자들도 유대 땅에 두루 다니며 ‘회개하라’고 외쳤다. 제자 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1)인정하라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으며(롬 3:23)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 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다.
(2)믿으라
죄로 인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담을 없애기 위해(엡 2:14)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벧전 3:18). 그분을 믿으라.
(3)받아들이라
당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당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라(요 1:12).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 3:16).
다음 기도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라. “주 예수님, 저는 죄인이며 당신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저의 삶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에게 오셔서 저와 함께 영원히 거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행하라
당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려라(계 3:20).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전도 방법으로 예수님의 명령대로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행 8:4).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증거 할 때 다양한 전도의 모습과 방법들을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예루살렘 교회의 전도 특징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운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직접 경험하였으며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리라”(행 1:11)는 신앙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전도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다는데 있다(행 2:14). 말씀을 전하기 전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았으며(행 2:4) 언제나 기도에 힘썼다(행 2:42).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서로 나누어 주었으며(행 2:43-44)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행 2:46)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교제하고(행 2:46) 하나님을 찬송하며(행 2:47) 가르침을 받았다(행 2:42).
이러한 결과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행 2:47). 또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집사를 따로 세우고(행 6:1-6) 개척 교회를 세웠으며(행 8:4-7)개척 교회를 지원하고 육성하였다(행 8:14-24; 고후 8-9장).
(2)사마리아 교회의 전도 특징
사마리아 지역은 이방 도시로 미신과 이교의 도시였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황금 만능의 사회풍조가 널리 퍼져 있었다(행 8:9-13, 18-24). 이런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 교회의 전도 특징은 빌립과 같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한 개인 전도였다(행 8:5-6, 26-40). 그리고 사마리아 교회는 전도를 위해 교육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다(행 8:6). 또한 신유를 통해 전도하였으며(행 8:8) 사도들의 영적인 지원(행 8:14-24) 하에 예루살렘 교회와 연합 사역을 하였다(행 9:31).
(3)안디옥 교회의 전도 특징
안디옥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요,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로 로마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도시였다. 인구 50만이 넘는 국제도시로 도덕적으로 환락과 타락이 가득한 도시이며 인구가 날로 증가되는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의 전도 특징은 바나바의 착한 성품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목회(행 11:24),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의 조화로운 협력 사역이었다(행 11:26). 또 안디옥 교회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는 일과 전도자를 파송하는 일을 하였다(행 11:29-30; 행 13:2-3). 파송한 전도자의 활동상을 정확하게 보고 받고(행 14:27) 계속 지원하며(행 14:26)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도록 하였다(행 11:20).
(4)빌립보 교회의 전도 특징
빌립보는 마게도냐 동쪽 해안 판게어스(pangaeus)산 동쪽 언덕에 자리 잡은 곳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이자 상업도시였다. 이 도시에 세워진 빌립보 교회의 전도 모습은 성령의 특별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었다(행 16:6). 특히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가정을 중심으로 전도하였다(행 16:14-15, 31-34). 빌립보 교회는 신분차별 없이 전도하였으며(행 16:20) 전도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지원하였다(빌 4:14-20). 특히 여자들이 전도자로 활동한 것이 빌립보 교회의 두드러진 전도 특징이었다(빌 4:1-3).
(5)고린도 교회의 전도 특징
고린도 교회는 동남쪽에 항구를 끼고 있는 천연 해양 무역도시였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중에 유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장막 만드는 일을 같이 하면서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였다(행 18:1-18). 고린도 교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종교적으로 다신교에 빠져 있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도 전략을 채택하였다.
첫째는,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하였으며(행 18:4) 동역자들이 적극적으로 협력 사역을 하였다(행 18:5).
둘째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행 18:5) 교회의 집회 장소를 옮겼다(행 18:7). 또한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전도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전도하였다(행 18:9-11).
(6)에베소 교회의 전도 특징
에베소는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아시아 주의 수도였다. 로마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이런 도시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구사한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한 것(행 19:8)과 철저한 제자 훈련이었다(행 19:9-10). 그들은 거룩한 생활의 본이 되기 위해 성령 받음을 강조했으며(행 19:2-6) 사도들의 이적과 능력을 통해 전도하였다(행 19:11-20).
2 세례 요한의 질문에 답변(2-6, 눅7:18-35)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 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가다리오리이까,’(2-)
옥에 갇혀 있는 요한이 예수께서 하신 사역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요한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세례를 베풀라 하신(하나님)이가 말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다고 말한바 있다(요1:33-3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요한의 지식은 유대 전통적으로 대망하고 있는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병자들이나 고쳐 주고, 전혀 현실성이 없는 산상수훈 같은 얘기나 하는 것일 뿐, 메시아로서 괄목할 만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에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당시 전통 유대사상의 메시아 인식은 그가 오시면 하늘의 권능을 가지고, 식민지 압제에서 해방, 힘 있는 유대왕국 건설을 통한 만국통치를 기대한 사상이었다.
혹시 요한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유대전통의 메시아라면 자기가 옥에 갇혀 있는 것을 두고만 보시지 안 하실 터인데, 하는 기대감의 실망에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하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된다.
이런 질문의 답으로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전하라) 보고 듣는 것,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되는 것, 이것을 그대로 전하라 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요한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일었을 것이다. 그리고 덧 부쳐 하신말씀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은 ‘요한아! 실족하지 말라’ 하신 메시지가 담긴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각종 질병과 죄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1)소경(Blind man)은 어떤 사람인가?
시력을 잃었거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소경들은 가난했으며(마 9:27)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셨다. 구약에서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고(레 19:14)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7:18). 또한 소경은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레 21:16-18).
소경이란 말은 상징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소경의 시력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회복시켜 주신 기록이 많이 나온다(마 9:27-30; 12:22; 15:30; 21:14; 막 8:22-25; 10:46-52; 요 9:1-7). 구약에는 소경이 눈을 떴다는 기록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사 29:18; 35:5; 42:7; 마 11:5; 눅 7:21).
성경에 나타난 소경의 발병 원인들에 대해서 선천적인 경우도 많지만 후천적으로 눈에 상처를 입거나 심한 열병을 앓을 때(레 26:16) 눈이 실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트라코마(과립성 결막염)라는 질병에 걸리거나 녹내장, 각막 백반, 망막염, 백내장, 피질 실명, 막질의 결막염, 수정체 염증 등과 같은 질병이다. 눈병을 앓으면 파리가 좋아하는 고름이 나오는데 파리는 이것을 잠자는 어린아이에게 전염시켜서 어린아이들이 눈병에 걸리기 쉽다. 이런 질병 때문에 속눈썹이 상하거나 안구의 기능이 감퇴되고, 염증이 모래나 따가운 햇 빛, 더러운 것에 의해 덧나게 되는 경우 소경이 될 수 있다.
또한 출산 시 유아의 결막에 산도의 임균이 들어갈 경우에도 유아들이 소경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원인들 외에도 성경에는 엘루마 처럼 죄에 대한 형벌로 소경이 되기도 했고(행 13:8-11)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시적으로 소경이 되는 경우도 나온다(행 9:3-9).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이 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욥 4:7; 시 38:5). 그래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그 원인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자기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요 9:2).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 된 이유에 대해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죄로 인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일로 대답해 주셨던 것이다(요 9:3-5). 예수님은 고난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도우시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보이시는가에 주목하셨던 것이다.
(2)앉은뱅이(Lame)는 일어나 앉기는 하여도 다리를 쓰지 못해서 제대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마 11:5). ‘저는 자’로도 표기되어 있다(사 35:6).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으며(마 21:14), 이들은 가난한 자의 대명사로도 사용되었다(눅14 :13).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a crippled)를 고쳤고(행 3:2)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적이 있다(행 14:8). 메시아가 오시면 저는 자와 눈먼 자와 귀머거리가 고침 받을 것이라는 것은 이사야의 주요 사상이다(사 35:5-10).
(3)귀머거리(deaf)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고(레 19:14),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주저하는 모세를 향해 벙어리나 귀머거리 등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아래 있음을 말씀하셨다(출 4:11).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인지를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귀머거리가 듣게 된다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셨고(마 11:5; 눅 7:22), 실제로 귀머거리를 고치시므로 메시아 되심을 확증하셨다(막 7:31-37).
영적인 귀머거리도 있다. 성경에는 육신의 귀머거리 못지않게 영적인 귀머거리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1)이사야는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전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의 상황을 귀머거리의 모습으로 설명했으며(사 6:9-10; 43:8), (2)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완고함을 귀가 할례 받지 못해 듣지 못한다고 했다(렘 6:10). (3)에스겔 역시 피상적인 것만 보고 듣는 백성들의 패역함을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고 표현했다(겔 12:2).
(4)가난(Poor)이란 돈, 재산,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가난이란 개념은 늘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히브리어 ‘아나임’(‘anaim)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시 37:14; 40:17; 69:29; 잠 16:19)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다(출 22:25-27; 23:11; 레 19:9-15).
3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7-19)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요한에 대한 위상을 설명 하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그러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여기서 ‘광야’(Desert, Wilderness-KJV)란 인적이 없고 개척되지 않은 넓은 들판으로, 개역성경의 ‘광야’는 히브리어 ‘미드바르’(midbar), ‘에쉬몬’(yeshimon), ‘아라바’(‘arabah), 헬라어 ‘에레모스’(eremos), ‘에레미야’(eremia) 등의 단어를 번역한 말이다.
성경에서 광야는 시험과 고난의 장소였던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이 나타났던 장소였다(출 3:12).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동쪽과 남쪽 경계 너머에 있는 광야들이 브엘세바(창 21:14), 에담(민 33:8), 다메섹(왕상 19:15), 에돔(왕하 3:8), 엔게디(삼상 24:1), 기브온(삼하 2:24), 모압(민 21:11), 바란(민 10:12), 수르(출 15:22), 시내(출 19:2), 신(출 16:1) 등과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40여 년을 지냈던(민 14:33) 곳으로, 마실 물이나 음식은 없었고(민 21:5) 위험한 짐승들이 있던 곳이었다(신 8:15; 32:10).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량하며 메마른 이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던(출 14:11-12; 16:2-3) 한편,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시편 기자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시 78:40; 95:8; 106:9)과 이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시 68:7; 136:16)을 소재로 노래했다. 선지자들은 황폐된 땅을 광야로 표현하기도 했다(사 63:13; 렘 22:6; 호 2:3). 때로 척박한 광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아름다운 땅으로 변할 장소로 언급되었다(사 32:16; 35:1; 51:3).
갈대(Reed)는 나일 강 주변이나 델타 호수들 같은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로, 보통 1-3m 정도의 키에 속이 빈 줄기와 길고 뾰족한 잎을 가진다. 특히 파피루스 갈대는 묶어서 배를 만들었고, 얇게 빻은 껍질은 붙여서 글자를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다.
성경에서 갈대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사 42:3; 마 12:20)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사야가 목자들이 양떼를 치면서 만들어 불던 갈대 피리를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갈대 피리가 망가지면 버리고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 수 있었는데도, 목자들은 자신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피리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다시 고쳐서 쓰곤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목자 되신 하나님은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죄로 인해 망가지고 상한 우리들을 감싸고 고치셔서 새롭게 살아가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갈대의 상징적 의미로 연약한 것(왕상 14:15; 겔 29:6), 변덕스러운 것(마 11:7), 날카롭게 찌르는 것(왕하 18:21) 등에 비유적으로 쓰였다.
여기서 갈대라 한 말을 두고 여러 해석들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갈대에 대해서는 ‘구경하기 위해서 갔었느냐 하는 말로 설명하고 싶고, 부드러운 옷(비단 옷)을 보러 갔었느냐는 뒤에 왕궁설명 하신 걸 보면, 뭐, 얻을 걸 바라고 갔었느냐?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이 당시 사람들은 유대광야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책망과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베푸는 이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 할 것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떼를 지어 요한을 찾아 갔던 사람들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무려 4백 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안 했던 이들에게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당시 사람들에겐 마음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 열광하면서 몰려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요한이 잡혀 감옥에 갇힌 모습을 보면서 요한에 대한 열망은 식어버리고, 돌이어 어쩌면 조롱 하는 사람들까지도 나올 법 한 상황에서 요한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하심으로 줏대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 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 이니라.’(12-13)
여기서 침노(Advance, Raid)란, 다른 나라를 불법적인 힘을 사용하여 쳐 들어간다는 뜻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지방에 머무는 동안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다(삼상 27:8).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말씀하셨다(마 11:12).
그렇다면 천국이 왜? 요한 때부터라고 했을까?
여기서 말한 요한의 때란 말은 신약시대의 출발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요한이란 인물은 구약으로는 마지막 선지자요(예언자요) 신약에서는 최초로 신약시대의 길을 닦은 자(문을 연자)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이 말은 신약시대(그리스도의 왕국)는 적당이 요식절차나 밟으면 천국 백성(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란 말씀으로 봐야한다. 누가복음 16장 16절을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
‘침입’이란 말은 전쟁용어의 하나다. 이 말을 쓴 것은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는 수동적으로 혹은 여러 가지 취할 것들 중의 하나로 적당히 얻어도 그만, 얻지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전쟁을 해서 영토를 얻어 낸 것처럼, 필연적인 것이고, 유일무이(唯一無異)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복음은 돈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권세나 이까진 일들보다도 절대적인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 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 니라’(14-) 여기서 ‘즐겨 받는다.’란 말은 ‘내 말을 기꺼이 받아드린다면’ ‘오리라 한 엘리야(말3:1)가 곧 이 사람’ 이란 말도 믿어라 하신 말씀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한 사람들인데, 예언된 엘리야는 사실 요한이지만 그들은 요한을 두고 ‘네가 엘리야냐?’(요1:21) 하고 물었으면서도 요한을 엘리야로 믿지는 안 했었다.(마17:10-13)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이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장터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기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7-)
장터(저자)(Marketplace)는 시장(市場)이 서는 장소를 말한다. 장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고라’(agora)는 집회 처, 공회소 시장을 뜻하는 말이다(마 23:7; 막 6:56; 행 16:19; 17:17). 신약 시대에 장터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고용할 사람을 기다리는 장소였으며(마 20:3)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였다(마 11:16; 눅 7:32). 같은 원어가 ‘시장’(마 23:7; 막 6:56), ‘저자’(행 16:19: 17:17)로도 번역되었다.
유대 풍습에는 결혼식 때에는 피리 꾼을 부르고, 장례식 때에는 울음꾼을 부르는 관례가 있었다 한다. 이것을 비유로 들어 반응이 없는 무리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이들이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돌이어 흠을 찾아 비판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18-19)
(5)귀신(Demon)에 대해서는 악신, 악령, 사신, 사귀와 동일한 말로, 구약성경에는 ‘귀신’에 해당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악한 신(demon)에게 제물을 드렸으며(신 32:17; 삿 9:23; 삼상 19:9 참고) 때로 인신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시 106:37).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들이었다(신 18:9-14). 신약에서 귀신(헬라어로 ‘daimonion’,‘daimon’)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 정신을 이상하게 하거나(막 5:15) 심한 경련(눅 9:37-42)을 일으키고 벙어리(마 9:32)나 눈먼 벙어리(마 12:22)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성경은 귀신을 사탄(바알세불)의 대리자, 앞잡이(마 12:24-30)라고 말한다. 귀신은 더러웠고(마 10:1) 사람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며(눅 8:29), 많은 수의 귀신이 함께 거하기도 했다(막 5:8-9). 또한 사람을 지배하고(마 8:29) 사람을 초월하는 능력(행 19:13-16)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고(막 1:24)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있었다(마 8:29). 때로 경배를 받기도 했고(고전 10:20)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딤전 4:1).
(6)세리(Tax collector)는 성경 시대에 나라의 세금을 거두던 사람을 말한다. 헬라어로는 ‘텔로네스’(telones)이며 ‘세’와 ‘산다’는 뜻의 합성어로 세금 징수의 청부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갑바이’(gabbai)로 불리는 수입세 등 일반세를 수금하는 세리와, 세관에서 관세를 받는 ‘목케스’(mokhes)라고 불리는 세리가 있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악질적으로 과다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마태가 이 ‘목케스’에 해당하는 세리였다.
세리들은 원래 세금 이상의 액수를 거두어 그 차액을 자신이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들을 죄인(마 9:10; 11:19), 창기(마 21:31), 이방인(마 18:17)과 같이 취급하여 배척하고 비난하였다(마 9:10-13).
이 때문에 이런 세리들을 친구로 삼으신 예수님도 비난받으셨다(마 9:11). 그렇지만 세리 중에는 삭개오(눅 19:1-10)나 마태(마 9:9)같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다.
(7)죄인(Sinner)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 죄인을 판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시다(창 13:13). 이는 도덕적, 윤리적인 죄를 범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게 대적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도 죄인이라고 했으며(삼상 15:18)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 또는 악인과 같은 뜻으로도 쓰여 졌다(시 1:1, 5; 104:35; 잠 13:21; 23:17).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고(마 9:11), 사람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들으셨다(눅 7:34).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마 9:13; 눅 5:32)고 하시며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 구원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왜? 이들이 이렇게도 완악한 자들이 되었을까?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전통적 유대(구약)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유대인들만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중세교회도 그랬고, 지금 개혁교회도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깨어 있는 사람은 인식을 해야 한다. 문제는 그 완악함이 새로 열려지는 시대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었다는 것을 거울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