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이신 유대인의 왕 (마태 12장-1)

by wgma posted Oct 11, 2015 Views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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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주인이신 유대인의 왕

     (마태 1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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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 실 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 이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눅 6:1-5)

 

누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일에 대해 이미 두 번 언급했다(눅 4:16, 31). ‘두 번째 첫 안식일’이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안식일들 말고 두 번째 언급하는 첫 안식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은 것을 보면, 그들은 몹시 시장했다. 제자들의 행위는 특별한 상황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로 규정하였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치고 있었을 때 놉 땅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나아가 떡 몇 개를 요청하였다. 아히멜렉에게는 보통 떡은 없었고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물려낸 거룩한 떡만 있었다. 그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상황에서 그는 시장했던 다윗과 및 함께한 자들에게 그 떡을 주었고 그들은 그 떡을 먹었다(삼상 21:1-6).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다윗의 그 사건에 비교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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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에서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儀式的)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 요소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약시대에 6일 동안 일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죄로 인하여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예수께서는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이것이 구원이다. 이 안식은 주안에서 시작되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신약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고 오늘날도 여전히 필요하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란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해 한 날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날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 계명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안식일이 주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7일이다 ‘나의 날’ 혹은 세속적인 날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7일이 다 하나님의 날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의 안식일인 주일을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날을 내 마음대로 산다면, 그 날의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의 주인이 주님이시요 주일의 주인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일을 범하고 버는 돈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안식일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안식(安息)보다 일(日) 즉 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날이나 절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에서 절기행사에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는 내용들을 보게 된다. 부활절, 감사절(맥추절,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때는 많은 계획들을 세우고 있다.

 

절기(Festival)는 종교상의 축제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날을 말한다(출 5:1).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은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것이었다(출 5:1; 레 23:1-44). 특별히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 일 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셨다(출 23:14-17).

 

이스라엘 백성이 지켰던 절기들

매주 드려진 절기 : 안식일(출 20:8; 레 19:3).

매달 지켜진 절기 : 월삭(민 28:14).

매년 드려진 절기 : (1)무교절(유월절, 출 23:15),

                            (2)맥추절(칠칠절, 오순절, 출 23:16),

                            (3)수장절(초막절, 장막절, 출 23:16),

                            (4)나팔절(레 23:23-26),

                            (5)속죄일(레 16;29-34).

 

나중에 도입된 절기 : (1)부림절(에 9:24-29),

                               (2)수전절(요 10:22).

 

월삭(月朔, New Moon)이란 그달의 초하루 날, 즉 월초라는 뜻이다. 매달 월삭에는 나팔을 불며 제사를 드렸다(민 10:10; 28:11-15). 표준 새 번역에는 ‘새달’이라고 옮겼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약 1년 반 정도 지날 때 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유대지도자들과 마찰이 서서히 시작이 되는 분위기를 보게 된다.

 

1) 밀밭 사이를 지나는 유대인 왕의 일행(1-8, 막2:23-28, 눅6:1-5)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대답을 하신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했느냐?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시절,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배가 고파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먹은바 있었다.(삼상21:1-6) 사람들의 삶의 기본적인 것은 의식주다,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밭으로 들어가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 누구든지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도 배가 고파서 밭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비판하는데 대해서 대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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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는 줄 모르느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한 뜻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성전 안에서 안식일과 절기를 범하는 현장을 보셨다.(요 2:13-16)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 제사장(Priest)은 제사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했다. 히브리어로는 ‘코헨’(kohen)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이외에 (1)애굽의 제사장(창 41:45; 47:26), (2)블레셋의 제사장(삼상 6:2), (3)다곤의 제사장(삼상 5:5), (4)바알의 제사장(왕하 10:19), (5)그모스의 제사장(렘 48:7), (6)아세라와 바알의 제사장(대하 34:5)에게도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제사장의 모습은 성경시대 초기에 자신을 위해 제사 드렸 던 아담, 가인, 아벨, 노아, 아브람 등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이 외에도 가족을 위한 제사장으로 일했던 가장들(출 12:3), 국가를 위해 제사장으로 뽑혔던 아론 자손 제사장,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제사장이셨던 예수님(히 3:1)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본다(벧전 2:9).

 

(1) 제사장의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가 되어 제사를 집례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보였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제사장 직분을 존속시킴을 통해 이어졌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1)레위인(출 34:19-20; 민 18:15; 신 15:19), (2)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 제사장, (3)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출 28:29) 등으로 나뉜다.

 

2) 제사장의 임무에 대해서, 제사장은 아론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으며(출 28:1; 레위 1:5, 7-8)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다(레위 21:16-23). 제사장들은 다윗 때에 24반으로 나뉘어 일주일씩 봉사하고 안식일 저녁에 다음번과 교대했으며(대상 24:1-19), 큰 절기 때에는 모든 제사장들이 함께 봉사했다. 이들 24개 가문 중 16개는 사독 가문, 8개의 가문은 이다말의 가문이었다(대상 24:1-19).

 

제사장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성소나 제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민 16:40). 그들은 매일의 희생 제사를 주관했고(민 28:3-8)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며(대하 15:3; 겔 7:26) 하나님의 뜻을 묻고(출 28:30) 문둥병자를 가려내는 일(레 14:2)도 했다. 재판관의 역할도 하여(신 17:8-9; 대하 19:8-11) 간음한 여인을 검증했고(민 5:11-31), 나실인의 정결 제물(민 6:1-21)이나 서원제(레 27:8-25) 등을 드리는 것에도 관여했다. 또한 제사장들은 축제일이나 전쟁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기도 했다(민 6:22-27).

 

3) 제사장의 재산들에 대해서 목록 1호는 하나님이었다(민 18:20). 하나님이 이들의 분깃이자 기업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 제사장들은

첫째로, 첫 아들과 짐승의 첫 새끼, 첫 수확물 대신 바친 돈(출 22:29; 민 18:15-16),

둘째로, 제사 때의 희생 제물 즉 제사 때의 요제물, 거제물(민 18:8, 11, 19), 소제물의 남은 것(레위 2:3),

셋째로, 레위인이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의 일부(민 18:26-28) 등을 받았다. 또한 48개의 레위인의 성읍 중에서 13개가 제사장들에게 주어졌다(수 21:4, 13-19).

 

4) 제사장의 위임식의 조건으로,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이혼당한 여인 등은 제사장의 아내가 될 수 없었는데, 이는 제사장이 거룩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레 21:7). 제사장들은 스스로 몸을 성결하게 해야 했으며(출 19:22),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수행도 먼저 거룩한 위임식을 행한 후에 할 수 있었다(레 8장).

 

제사장의 위임식은 7일간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성막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레 8:33-35). 위임식은 먼저 회중을 모으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도록 명령하신 것을 공포했다(레 8:2-5).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물로 깨끗이 씻긴 후(레 8:6) 예복을 입힌 뒤 관을 씌우고 거룩한 관이라고 쓴 금패를 붙이고(레 8:7-9) 다시 관유를 머리에 부었다(레 8:12). 마지막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한 뒤 불사르고,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 번제를 드렸다(레 8:14-21).

 

진설병(Consecrated bread)은 고운 가루로 만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성소 안의 떡 상에 올려놓는 떡을 말한다. 원래 뜻은 ‘그 얼굴의 빵으로’,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는 빵이다(출 25:30). 진설병은 열두 개의 구운 빵으로 한 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진열하였으며(레 24:6-7) 매 안식일마다 상 위에 올려놓는 일은 제사장이 맡았다(삼상 21:6).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 거두어들인 빵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는데(레 24:5-9), 다윗의 경우 제사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과 함께 진설병을 먹었다(삼상 21:1-6). 진설병을 두는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금테를 주위에 둘렀으며 그 상의 위치는 성소의 북쪽 등대 맞은편에 있었다(출 26:35).

 

사실 안식일 날 밀 이삭 잘라먹는 것이 그리 큰 문제될 것은 없다. 이것은 모세 율법으로 금지한 것도 아니고, 제사장들이 만든 유전에 불과 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유전을 성경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본질이 담고 있는 뜻 보다는 형식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이것을 문제 삼은 것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들의 문제 제기에 별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게기로 당신에 대한 중요한 지식 두 가지를 밝히고 있다.

(1)첫째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 보다 더 큰 자라는 사실과.

(2)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란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 세 가지가 있다.

(1)첫째가 안식일,

(2)둘째가 예루살렘 성전,

(3)셋째는 하나님의 법궤였다.

 

구약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전체를 대표한 것으로 사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정된 것들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고,(요2:21) 안식일에 대해서는 본문 8절에서 당신이 곧 안식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미 마태 11장에서 언급한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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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Temple)이란 신성한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실 장소’로서 특별한 곳을 선택하겠다고 약속하셨고(신 12:11) 오직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신 12:13-14). 바로 그곳이 구약에서의 성전이다. 한편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전에서 예배자들과 만나기를 선택하셨고(대하 6-7장) 이제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신자의 안에 거하심을 말한다(고전 6:18-20).

 

본래 안식일이란 뜻이 쉬는 날이란 의미인데, 사람들이 날을 지킨 다고해서 안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참 쉼이 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 이란 곧 그리스도를 두고 예언된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궤에 대해서는 법궤 안에 담겨있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법궤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었다.

 (1)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

 (2)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3)아론의 싹 난 지팡이였다.

  (1-1)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 판은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1:14)을 의미했고,

  (2-1)만나는 생명의 떡으로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요6:47)이 되신 예수의 살을 말한 것이며,(요6:47, 53-58),

  (3-1)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예수의 부활을 의미한 것으로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심을 상징적으로 가르친 증표였다.

 

이 3가지가 예수를 가르친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겉으로 나타나 있는 모형(구약율법)을 지키고, 붙들고 사는 것이 믿음이고, 절대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체가 되신 예수가 오셨지만 그 예수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보지 못한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9:39)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본래 모형(설계도)이란 실체가 완성되면 모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2) 안식일을 범한 유대인의 왕(9-21, 막3:1-6, 눅6:6-11)

예수님이 다음에 가신 곳은 회당이었다. 거기에 때마침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할 계획으로 꼬투리를 잡기위해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 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 밀라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 하더라,’

 

구덩이(pit)이란 땅이 움푹하게 팬 곳이다.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아서 달아나던 소돔, 고모라 군사가 빠졌다(창 14:10). 구덩이는 형들에게 미움을 샀던 요셉(창 37:22)과 예레미야(렘 38:6)가 던져졌던 곳이며, 때로 동물(출 21:34; 마 12:11)이나 사람이 빠지기도 했다(마 15:14).

 

구덩이는

 (1)음부와 같은 말로 죽음(욥 33:28; 사 38:18),

 (2)죽어서 내려갈 곳(사 51:14)을 의미했고,

 (3)하나님의 심판(사 24:17-18),

 (4)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렘 18:20) 등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마 15:14)에 빠질 것이라고 하시며, 바리새인들이

진리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도리어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는 안식일에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 내거나 다음날까지 짐승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선으로 규정, 허용했다고 한다. 이것을 예수께서 역으로 짐승이 중한가, 사람이 중한가를 그들에게 제시함으로 스스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만드시고, 손 마른 자를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 자리에서는 침묵을 했지만 뒤에 가서는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마태는 이 장면을 두고 이사야 42장 1절로 3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진리의 선포 앞에서는 어느 시대든지 기득권 세력은 공개적으로 토론을 제안하거나 벌린 적은 없다. 항상 뒤에 가서 수근덕대며, 자기들끼리 음모를 꾸미며 죽일 기회를 찾는 자들이었다.

 

이런 형편은 예수님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혁 전 개혁자들도 그랬었다. 뒤에서 음모를 꾸며, 투옥이나, 화형을 시켰고, 이분들의 희생이 훗날의 개혁교회를 탄생 시킨 것이다. 21세기 지금은 어떨까? 지금이라고 다르겠는가?

 

지금의 개혁교회, 이대로는 결코 미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더 기울기 전에 대안(代案)의 새 Paradigm이 나와야 한다. 안타까움이 있다면 미래 하나님의 교회보다는 혹 지금 기반 붕괴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뿐이란 데, 아쉬움이 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원한 모습은 아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20-21)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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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Reed)란? 나일 강 주변이나 델타 호수들 같은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로, 보통 1-3m 정도의 키에 속이 빈 줄기와 길고 뾰족한 잎을 가진다. 특히 파피루스 갈대는 묶어서 배를 만들었고, 얇게 빻은 껍질은 붙여서 글자를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다.

 

성경에서 갈대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사 42:3; 마 12:20)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을 의미하며 이것은 이사야가 목자들이 양떼를 치면서 만들어 불던 갈대 피리를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갈대 피리가 망가지면 버리고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 수 있었는데도, 목자들은 자신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피리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다시 고쳐서 쓰곤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목자 되신 하나님은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죄로 인해 망가지고 상한 우리들을 감싸고 고치셔서 새롭게 살아가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갈대의 상징적 의미 :

 (1)갈대는 연약한 것(왕상 14:15; 겔 29:6),

 (2)변덕스러운 것(마 11:7),

 (3)날카롭게 찌르는 것(왕하 18:21) 등에 비유적으로 쓰였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이 말씀을 어느 주석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인간의 영 육간에 연약해져 있는 사람을 몰인정하게 대하지 않고 깊은 연민과 따스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긍휼하심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해석한 이도 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분석해 볼 수도 있다.

 

  본문은 유대교를 두고 예언된 말씀으로 봐야 한다. 유대교는 이미 상해버렸고, 이미 꺼져가는 등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써먹을 수도 없는, 수명이 다 되어버린 조직, 아직은 저들의 조직과 기반과 세력을 갖고, 음모를 꾸미고, 위협을 하지만 참고 기다리는 것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다.’ 그 때가 언제인가?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선포하신 그 순간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심판하여 이길 때’란 말씀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실 ‘심판하여 이길 때’ 이것을 십자가 사건으로 보는 것이고, 이어서 ‘이방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한 말씀이 뒷받침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傷)한 갈 때 란 소생이 불가능 한 것이고, 꺼져가는 심지는 수명이 다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구약교회를 끝내고, 신약시대의 지평을 여는 구속사의 대 전환을 예언한 말씀이란 것이다.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교(유대인)를 버리는 사건(심판)이었고, 이방인들에겐 구원의 사건이 되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말씀으로만 적용된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적용되는 말씀으로 봐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분명 상(傷)한 갈대가 되었고, 불이 꺼져가는 등이 되었다(수명이 다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 교회되기 위해서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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