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바알세불 (마태 12:22-37)

by wgma posted Oct 25, 2015 Views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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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바알세불

(마태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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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임이나 두 세 사람이상 모임을 가질 때 의견들이 엇갈릴 수 있다.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여 따라가는 타입의 사람도 있다, 문제는 언제나 의견이 서로 다를 때 분위기도 달라지고 대화의 결과를 매듭짓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종교적인 영적 면에서 혹은 반응들은 다양하다. 분명히 엇갈린 반응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지적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이해력에 의해서 자기중심적이냐 아니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고집이냐?로 갈라지는 것이 인간들의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분위기나 특수한 사건을 판단 혹은 비판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 예로서 예수님의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나 제자들이 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때에 엇갈린 반응이 있었다,

1) 엇갈린 반응 (22-37, 막3:20-30, 눅6:43-45, 11:14-23, 12:10)

앞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던 장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귀신들려 말을 못하고, 보지 못했던 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놓고 엇갈린 반응이 나타났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귀신이 쫓겨나가고, 앞을 보지 못하던 자가 보게 되고, 말 못하던 벙어리가 말을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기 ‘놀랐다’란 말은 ‘엑시스탄토’(έξίσταντο)라는 말로 ‘얼이 빠진’ 혹은 ‘정신이 나간’ 이런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말이고,

*귀신(Demon)은 악신, 악령, 사신, 사귀와 동일한 말로, 구약성경에는 ‘귀신’에 해당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악한 신(demon)에게 제물을 드렸으며(신 32:17; 삿 9:23; 삼상 19:9 참고) 때로 인신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시 106:37).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들이었다(신 18:9-14). 신약에서 귀신(헬라어로 ‘daimonion’,‘daimon’)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 정신을 이상하게 하거나(막 5:15) 심한 경련(눅 9:37-42)을 일으키고 벙어리(마 9:32)나 눈먼 벙어리(마 12:22)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성경은 귀신을 사탄(바알세불)의 대리자, 앞잡이(마 12:24-30)라고 말한다. 귀신은 더러웠고(마 10:1) 사람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며(눅 8:29), 많은 수의 귀신이 함께 거하기도 했다(막 5:8-9). 또한 사람을 지배하고(마 8:29) 사람을 초월하는 능력(행 19:13-16)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고(막 1:24)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있었다(마 8:29). 때로 경배를 받기도 했고(고전 10:20)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딤전 4:1).

*벙어리(Mute)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농아(聾兒)가 있고, 발성기관은 정상이어도 들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말할 능력을 상실한 청아(聽啞)가 있다.

성경에는 벙어리가 되는 원인 중 하나가 귀신에 의한 것으로 나온다(막 9:17; 눅 11:14).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벙어리가 되게 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을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게 하신 것과(겔 3:26) 아들을 낳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사가랴를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게 하셨던 것이 그 예이다(눅 1:20).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면 벙어리가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35:6). 예수님은 벙어리와 같은 장애인들을 고치시는 이적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사 29:18; 35:5-6; 42:7; 61:1)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셨다(마 11:5; 12:22; 눅 4:18).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은 메시아이신 다윗의 후손을 말한다(마 1:20; 눅 1:27).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예수의 수태 사실을 알릴 때 그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으며(마 1:20; 눅 1:27),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마 9:27).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사람으로는 바디매오(막 10:47-48), 가나안 여인(마 15:22), 아이들(마 21:15) 등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바였다(삼하 7:12; 사 9:7; 렘 23:5; 겔 34:23-24).

여기서 ‘다윗의 지손’이란 말은 ‘메시야’란 말과 병행해서 부른 말이다. 그런데 이 광경을 똑같이 목격했던 바리새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이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된 일’이라고 평가절하를 했다. 왜 이렇게 엇갈린 반응이 나왔을까? 왜 그랬을까?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는 사건이라고 판단해서 그랬을까?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통적 지식이, 이 놀라운 사건을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바알세불(Beelzebul)은 구약에 등장하는 에그론의 신 즉 팔레스타인의 토착신인 바알세붑(‘파리들의 주’-왕하 1:2-3)과 동일한 신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사탄(마 12:27; 막 3:22, 26; 눅 11:18)이나 귀신들의 왕과 동일시되고 있다(마 12:24, 27; 막 3:22; 눅 11:15, 18 이하). 예수님 당시 이 단어는 ‘그 집의 주인’으로도 이해되었던 것 같다(마 10:25).

사람은 항상 자기가 경험하게 습득한 지식을 기준 삼아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하지 않는 소리나, 자기 지식 밖의 사건 앞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비판을 하기 마련이다. 이 같은 현상은 자기스스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일수록 더 크게 거부하고 반발을 하게 된다.

지금 바리새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아니한 이론이나, 새로운 사건 앞에서는 검토할 여유도 없이 악한 화살로 공격을 하는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두고 무식하기 때문에(귀신들렸기 때문에)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판단을 하게 된다. 지금 바리새 사람들이 예수의 행적을 볼 때, 지금까지 자기들의 경험이나, 배운 지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은 귀신을 힘입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 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는 하나님의 초월성마저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결국 용서받지 못할 자리에 이르고 만다. 아마도 성령을 훼방하는 무서운 죄가 아닐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개역개정=강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8-30).

*결박(Bond)이란, 강제적으로 손, 발을 묶는 것을 말한다. 몸의 매임, 투옥, 속박, 마음이 시달리는 것을 말할 때도 사용한다. 성경에서는 악의 속박(사 58:6), 여러 속박에서의 해방과 관련하여 쓰였다(렘 2:20; 5:5).

성경에는 결박과 관련된 사건이 많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결박했으며(창 22:9) 시므온은 형제들을 대신하여 요셉 앞에서 결박당했고(창 42:24), 삼손은 그를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주려는 들릴라에 의해 결박당했다(삿 16:5, 8, 12). 왕들 중에서 므낫세 왕은 앗수르 군대에 의해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고(대하 33:11) 여호야김 왕은 느부갓네살에게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갔으며(대하 36:6) 시드기야도 눈이 뽑히고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갔다(렘 39:7, 9).

예레미야는 시위대장에게 결박당했고(렘 40:1)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결박당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다(단 3:21).

신약에서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결박당해 옥에 갇혔고(마 14:3),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으며(마 27:1-2), 바울도 천부장에게 결박당했다(행 21:33). 한편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 받으며(계 9:14-15) 또한 천사가 사탄을 천년 동안 결박할(계 20:2) 것이라고 기록했다.

*세간(Goods)이란 집안 살림에 쓰는 온갖 물건들을 말한다(느 13:8; 마 12:29; 눅 17:31). 고고학적 발굴 자료를 기초로 볼 때 성경 시대의 세간은 등잔, 나무로 만든 가구, 가정용 그릇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거실에는 기름등잔이 있었는데 등잔의 종류도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해 깨진 항아리의 밑동을 사용한 초기의 등잔, 심지를 놓을 수 있도록 구석들을 좁게 오무린 정방형 접시 모양의 등잔, 한쪽 구석만 오무린 타원형의 등잔,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등잔 등 다양한 등잔들이 있었다.

여리고의 무덤에서 발견된 잘 보존된 나무 가구들로부터 당시의 발달된 목공 술을 볼 수 있으며 구약성경에는 ‘식탁’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삼상 20:29; 삼하 9:7; 왕상 10:5; 사 21:5). 장미꽃과 달걀, 화살, 꽃무늬가 조각된 돌 탁자도 예루살렘의 서편 언덕에서 발굴되었다. 침대는 짚으로 된 돗자리를 비롯해 선지자 아모스가 게으른 부자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퍼부을 때 지적한 상아로 꾸민 나무침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암 6:4). 에굽인들은 침대에 나무 베개를 부착해 놓았으며 사울과 다윗 시대에는 염소 털로 된 베개가 사용되었다(삼상 19:13).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그릇들의 대부분은 오지그릇이거나 붉은 질그릇이었고 오늘날의 것보다 두껍고 무거웠다. 보통 가정에서는 갈색이나 회색의 소박한 대접들과 주전자, 접시 등을 사용하였으며 아브라함 시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밑바닥이 평평하고 옆면은 둥글고 가장자리에 안이나 밖으로 테를 두른 그릇들을 사용했다. 성경 시대에 가장 우아한 가정용 그릇 중 하나는 높이 10-25cm의 오지병이다(렘 19:1-5). 그리고 ‘순례자의 병’이라고 부른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바퀴모양에 가까운 둥근 몸체에 마시기 쉽고 마개를 막기 쉽도록 고안된 좁은 병목을 가진 물병도 있었다(삼상 26:11; 왕상 19:6).

신약성경에서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큐오스’(skeuos)는 농기구, 군사 장비, 선박 기구, 제사 그릇 등 다양한 용기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로 우리말의 ‘세간’ 보다는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막 11:16; 눅 8:16; 행 27:17; 히 9:21).

2) 용서 받지 못할 죄

‘사람에 대한 죄와 모독(개역한글=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

*훼방(Blasphemy)이란?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거나 그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사람을 훼방한 것(시 15:3; 22:6; 마 15:19)뿐 아니라 하나님(레 24:11, 16; 민 15:30; 마 12:31)을 훼방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즉 사람을 향해서는 비웃고 조롱하는 것(시 119:42; 잠 30:10), 하나님을 향해서는 욕하는 것(민 15:30; 왕하 19:4; 사 37:4; 계 13:6; 16:11)을 말한다.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훼방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고(레 24:11-16; 민 15:30)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히 성령을 훼방하는 것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 12:31). 성령 훼방 죄에 대해서, 성경에는 용서에 관한 수많은 약속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마 12:22-37; 막 3:22-30; 눅 11:14-23).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훼방이라는 말은 ‘저항적이고 불경스러운 태도’를 말한다.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신,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고도 악의적으로 말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말이 쓰였다(막 3:28-30). 그들은 명백한 증거를 보고서도 그것을 성령이 아닌 사탄이 행한 기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무엇을 두고 성령을 모독(훼방)하는 죄라 하는 것일까?

지금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이며, 예수님의 활동은 새로운 신약시대를 여는 계시 활동(복음 증거)의 하나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5-37)

*심판 날(Day of judgment)은 하나님께서 행악자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실 마지막 날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말한다(마 16:27; 행 17:31; 롬 2:16). 예수님은 심판 날에 대해 여러번 말씀하셨다(마 10:15; 11:22-24; 12:36-42; 눅 10:14).

심판 날(벧후 2:9; 요일 4:17)을 다른 표현으로

(1)여호와의 날(사 2:12; 13:6-9; 욜 2:1, 11, 31; 3:14; 암 5:18; 습 1:7-10; 스 14:1 말 4:5; 행 2:20; 벧후 3:12; 계 6:14),

(2)주의 날(고전 1:8; 5:5; 고후 1:14; 빌 1:6; 살전 5:2-3; 살후 2:1-2; 벧후 3:10),

(3)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4)그 날(딤후 1:12, 18; 4:8; 히 10:25),

(5)권고하시는 날(벧전 2:12)로도 표현되었다.

*심문(Examiation, Punishment)은, 자세히 따져서 묻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심문하실 권한이 있으신 분으로 하나님은 배역한 그의 백성을 바벨론에게 위임하여 심문권을 행하셨다(겔 23:24).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심문을 당하실 것이라고 이사야에 의해 예언되었으며(사 53:8) 이사야의 예언대로 빌라도에게 심문받으셨다(마 27:11). 바울도 로마인의 심문을 받았지만 죄목을 찾을 수 없어 석방될 무렵 유대인들의 반대로 석방이 되지 않자 로마 가이사에게 재판을 호소하였다(행 28:18-19).

*정죄(Condemn)란 죄가 있는 것으로 판정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정죄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기초한 것으로 구약은 대부분 율법을 어겼을 때 그에 상응하는 죄의 결과로 형벌을 받게 되며 분리나 소외, 추방 등을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정죄당한 자는 제사를 통하여 속죄를 받을 수 있었다(레 4-6장 참고).

신약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정죄하는 개념이 더 확장되었는데(요 3:18; 5:24; 롬 3:19-20),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 여부에 따른 것이었다(요 3:16). 그러나 신약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정죄의 목적은 한 영혼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다(요 3:17; 고후 7: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어느 누구도 송사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용서와 칭의를 선포한다(롬 8:33-34).

무엇을 두고 쌓은 선(善)이요, 쌓은 악(惡)이라고 하신 것인가? 바리새인들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온 구약지식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그 지식으로 예수사건(신약사건)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지식은 악(惡)의 지식이 된 것이고, 예수님의 사건을 인정하고 받아드린 지식은 선(善)의 지식이 된 것이다.

그래서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7-) 하신 것이다. 조금만 겸손하고, 열려진 마음이 있으면 새 계시의 빛이 그들 마음에 선(善)의 지식으로 쌓이게 될 것을, 선입된 구약지식이 쌓여있어 안타깝게도 바리새 사람들의 마음엔 새 지식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마태 2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베들레헴 사관엔 먼저 온 사람들(구약지식)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새 지식)가 태어나실 방이 없어, 마구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상징적 교훈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21세기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새 역사가 도래될 때는, 옛 자식(전통지식)에 붓 들려 있는 사람은 새 지식을 받아들일 틈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요8:4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부심을 갖고 산 유대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란 걸 주목하기 바란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요 17:16). 만일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으며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던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여기 ‘무익한 말’은 아르곤(άρϒόν) 이란 말로 ‘단순히’ ‘의미 없이’ ‘쓸모없는’ ‘지나가는’ 이런 말로도 번역 될 수 있는 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동안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말이라고 해서 함부로 비판하고, 거부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심판 날에 반드시 심문을 받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신약 시대의 복음을 두고, 이방인들이 사탄의 앞잡이 노릇한 경우는 특별히 악역을 맡은 자들 외에는 사탄의 앞잡이 노릇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극렬한 사탄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전통적 지식(쌓아온 지식)에 의존된 신앙이 될 때는 자기 판단이나 행위가 정당한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사탄의 앞잡이가 될 확률이 훨씬 큰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청년 사울이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은 전통적 지식에 매달린 신앙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하시는 성령의 조명(계시의 빛)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활동을 안정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습득해 왔던 지식은 계시의 빛에 굴복시켜야 하고, 항상 계시의 빛에 목마른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계시활동에 의해서 살아있는 교회로 존재되고, 계시활동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로, 악(그동안 쌓아온 지식)의 지배아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신학(神學)에서 언급한 ‘점진적 계시’란 말이 왜 있는가?

그 뜻이 무엇인가를 주목하고, 그 필요를 인식했으면 좋겠다. 성령의 조명 없는 지식은 도리어 악(惡)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이 일은 당신이 의인(義人)이냐, 악인(惡人)이냐가 결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했으면 한다.

아무리 완벽한 신학이나, 교리나, 조직이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성령의 계시활동이 없는 것은 세상에 속한 종교조직은 될지언정, 하나님의 생명이 활동하는 살아있는 교회는 될 수가 없다.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사탄의 회(계2:9)가 되어 있는 바리새사람들, 전통적 지식에서 벗어나, 성령의 계시활동에 의존 된 신앙이 되지 아니하면, 유대교의 운명이 된다. 어쩌면 21세기 교회는 지식만 있는 교회란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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