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3장-2) 강해 - 비유로 말씀 하신 내용

by wgma posted Nov 26, 2015 Views 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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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장-2) 강해  - 비유로 말씀 하신 내용

(마태 13: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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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얼마나 이해를 하고 알아들을 수 있을까? 다 같이 성경을 가지고 수십 번 수백 번 읽고 신학교에서 혹은 설교가, 교사들로부터 들어왔지만 이해력부족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예화)로 쉽게 설명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혹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알아듣도록 쉽게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1)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마 13:34-35, 막 4:33-34)

마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라 하고 시78편 2절을 인용 하면서 ‘창세로부터 감 추인 것들을 드러내려는 것이라 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마가는 ’제자들이 비유로 하신 이유를 물으니 그 답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서 답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비유라는 단어가 신약에 52번(서신서에 3번 포함, 갈 4;24, 히 9:9, 11:19) 나오고 있다. 복음서에 49번(마태 17번, 마가 12번, 누가 19번, 요 1번) 번 나오고 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함이라’(막4:11-12)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 하시더라’(막4:33-34)

마태와 마가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마태는 시편을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각각 인용한다. 마태는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려는 것이라 하고, 반면 누가는 오히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하여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사6:9-10), 상반된 입장을 설명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상반된 견해라기보다. 복음의 특수성을 두 사도를 통해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의 특수성이란 복음 증거에는 구원과 심판의 효력이 동시에 적용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막16:16) 그래서 감추어진 비밀을 비유로 설명할 때, 듣고 깨닫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아무리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도 듣지 못한 자들에게는 더 감추어진 비밀이 되어 정죄에 이른 다는 점에서 두 사도의 설명은 하나에서 완성된 메시지로 봐야 할 거란 생각이다.

2) 가라지 비유의 설명 (마 13:36-43,)

‘예수께서 무리를 떠 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꾼은 천사들이니, 그런 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 세상(World)이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세계를 말한다. 헬라어로는 ‘코스모스’(kosmos)인데 ‘우주’(요 1:10), ‘인간 세상’(요 3:16), ‘하늘과 땅 전체’(행 17:24), ‘지적인 세계’(고전 4:9), ‘사람이 사는 곳’(고전 5:10)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

세상은 특별히 요한과 바울에 의해 신학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는데 ‘코스모스’는 죄인들의 욕망과 무너진 신뢰감과 출렁이는 분노로 짜여 진 현 사회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세상은 어두운 곳이며(엡 6:12)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다(요일 5:19). 또한 이곳은 하나님의 원리원칙과는 반대되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고전 2:12; 3:19; 11:32; 엡 2:2; 골 2:20; 약 1:27; 4:4; 요일 2:16).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셨으며(요 1:10), 자신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신다(요 3:16).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요 1:29; 요일 4:14),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9:5; 12:46). 반면에 요한일서 2:15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대치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요한복음 3:16의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을 대상을 뜻하는 반면, 요한일서 2:15의 세상은 멸망 받을 자들이나 어두움의 세력들, 곧 사탄의 세력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세상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고 또 회복되어가고 있으며 성도는 그런 이 세상 안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사탄이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다.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참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며(요 15:19),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치우치지 말라(요일 2:16)는 말이다.

* 천국(Heaven)에 대해서

(1)천국의 별칭들

1. 곳간 : 천국은 곳간으로 불리운다(마 13:30).

2. 아버지 집 : 천국은 아버지의 집이라 불린다(요 14:2).

3. 안식처 : 천국은 안식처라 불린다(히 4:9-10).

4. 낙원 : 천국은 낙원이라 불린다(고후 12:4).

(2)천국의 특징

1. 천국은 높은 곳이다(사 57:15).

2. 천국은 거룩한 곳이다(시 20:6).

3. 천국은 행복한 곳이다(계 7:17).

4. 천국은 죽음, 눈물, 슬픔, 울음 또는 고통이 없는 곳이다(계 21:4).

(3)요한계시록 22장의 천국의 모습

1. 천국은 생명수가 흐르는 깨끗한 강과 12종류의 과실나무가 있는 아주 만족스런 곳이다(계 22:1-2).

2. 천국은 나라들을 소성하게 나뭇잎들이 있는 곳이며 모든 것이 찬란히 준비되어 있다(계 22:2).

3. 천국은 저주가 없는 완벽한 무죄 상태이며 에덴에 내린 저주는 인간에게서 영원히 사라진 곳이다(계 22:3).

4. 천국은 한 분인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완벽한 정부가 있는 곳이다(계 22:3).

5. 천국은 완전한 섬김이 있는 곳이다(계 22:3).

6. 천국은 완벽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이다(계 22:4).

7. 천국은 완전한 소유가 있는 곳이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만 속할 것이다(계 22:4).

8. 천국은 완전한 영광이 있는 곳이며 그 곳에는 인조 등이 없는 곳이다(계 22:5).

(4)천국에 사는 백성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0:10에 의하면 악마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누가복음 12:13에 의하면 도둑들도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또 “두려워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계 21:8)도 역시 들어갈 수 없고, 갈라디아서 5:19-21에 언급된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6:9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그 곳에서 살고 계시며 사도행전 3:2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신 후 그곳에 가셨다. 또한 마태복음 18:10과 26:53에 의하면 천사들과 무수한 피조물들도 그 곳에 있으며 창세기 5:24, 열왕기하 2:11, 마태복음 17:3에 의하면 하늘로 올려간 에녹과 엘리야, 모세도 그곳에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죽은 모든 사람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살전 4:14).

* 가라지(Weed)란 강아지풀을 말하나 성경에서는 독 보리와 같은 잡초를 말한다. 모양은 밀과 비슷하나 이삭이 나면 구별이 뚜렷해진다. 예수님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 비유를 통해 지상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 성도들(가라지)과 함께 살고 있지만 마지막 심판 때 구별되어 참 성도들은 천국에, 거짓 성도들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마 13:25-27, 29-30, 36, 38).

여기서 신중하게 주목해야 할 메시지가 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계20:10, 참고) 여기의 가라지는 누굴까?(앞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거짓 선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고, 거짓선지자는 누군가? (이 말씀도 앞에서 잠시 언급했다) 거짓말을 진리처럼 가르치는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조금이란 표현에 주저가 된다. 왜냐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의 교회당 교회구조가 ‘거짓을 진리처럼’ 가르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할까? 전통 의식으로는 오해할 소지가 크다. 하지만 오해를 한다 할 찌라도 언급을 해야 미래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언급을 한다.

목회하는 이들은 이 말을 들을 때는 어쩌면 몹시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기분 나쁘게만 듣지 말고, 개선을 위해 신중히 검토를 했으면 좋겠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1-43)

* 불법(Lawlessness)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거스리는 것을 말한다(욥 13:23; 겔 9:9; 14:13). 불법은 곧 죄이며(요일 3:4), 불의함,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불법, 곧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여 주셨다(요 8:34-36)는 의미이다. 또한 그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것을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고후 6:14).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마 7:23)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외식주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 안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다(마 23:28).

* 풀무(Furnace)라는 말은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도가니, 쇠로 만들어져서 금속 등을 용해하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잠 17:3; 렘 6:29; 겔 22;18). 가죽을 무두질하거나(호 7:4-7) 빵을 굽는 데도 사용하였는데(느 3:11; 사 31:9 참고 ) 빵을 굽는 풀무는 개역성경에서 화덕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레 2:4; 26:26).

풀무는 하나님의 연단(잠 17:3; 사 48:10)이나 심판(말 4:1), 지옥(마 13:42; 계 9:2) 등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또 신명기 4:20에서는 애굽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한편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는데(창 38:24; 레 21:9; 렘 29:22)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풀무불 속에 던져지는 극형을 받았지만(단 3:1-23)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지 않았다(단 3:26-27). 이들이 던져졌던 풀무는 금속을 제련하는 용광로이기보다는 벽돌을 굽는 가마였을 것으로 본다.

‘그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 여기의 이 말들은 앞에서도 언급된 말씀들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나라’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많은 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었다. 뒤에 43절에서도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이 나라란 말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 해 본적이 있는가? 왜 우리가 그 나라에 대한 부탁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는지 아는가?

그리도 부탁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고 종교구조에 묻혀 살아온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 사도들이 복음 증거 하고 다니던 지역들이 로마통치 지대들이었다는 것, 그래서 나라란 말을 쓰지 못하고 대신 교회란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것을 로마교회를 만들면서 종교시스템으로 만든 것이 전통이 되었다는 것, 2번째 영향을 받은 것은 ‘무천 년 설’이란 종말관 학설의 영향이다. 무천 년 설의 주장은 교회는-하나님의 나라다. 란 인식을 갖게 했다. 그래서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의 나라 일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로 하나님의 나라란 contents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뒤 늦게 지금의 교회 시스템이 종교시스템이란 걸 알았고, 이 시스템은 복음이란 성질과 전혀 다른 이질적이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깨닫게 된 것이 지금의 구조로는 자연히 거짓을 진리처럼 가르쳐야 하는 이런 모순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받아드리고, 안 받아드리고는 독자의 몫이다. 다만 정보를 제공하는 것뿐이니 크게 오해 없기를 바란다.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나라가 임하기 위해 기도해라’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왔다.’(요18:37)

교회란 말은 복음서에 2번밖에 기록된 것뿐이지만, ‘나라’에 대한 언급은 복음서에만 132번(행전에 9번 = 개역한글에 합 141번)이 언급 되었다.는 뜻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또는 예수께서 부활하시어서 40일 동안 살아 계심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교회에 관한 말씀은 한마디도 언급하신 적이 없는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행1:3) 이것은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여기서 하나 더 생각 해 보자, ‘너희는 교회를 먼저 구하라’ ‘너희는 교회가 설립(임)되기를 위해 기도해라’ ‘의인들은 아버지의 교회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된 곳이 있던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어떤 행동을 두고 넘어지게 하는 자라 할까?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자고 제안 하는 것을 두고 방해하고, 모략하고, 비판하고, 엉뚱한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그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들은 혹시 아닐까?

앞에서 언급해온 ‘무천 년이란 종말 학설 같은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넘어지게 하는 학설은 아닌가? 이것을 주장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또 어떻게 대우를 해야 하나? 지금을 생각하지 말고 심판의 날을 생각해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전통적 유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는가? 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보지 못하고, 예수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지 아는가? 당신이 전통적 유전에 매달려있는 한 당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그 나라의 메시지도 듣지 못한다고 하면 긍정하겠는가?

어쩌면 긍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지식이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 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제라도 전통지식을 벗어나 ’그 나라’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긴 역사와 전통이란 것 때문에 쉽게 Accept을 안 할 수도 있다. 다만, 이제라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의 조명일 수도 있다면, 이것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일 이란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의 거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가 판단해 주기 바란다.

3) 천국의 3가지 비유(44-50)

첫째 ‘천국은 마치 밭에 감 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44-)

* 보화(寶貨, Treasures)란 보물과 화폐를 총칭하는 말이다. 성경에는 같은 원어가 보물(왕상 14:26), 보배(사 33:6), 재물(대하 25:24)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고대에서 보화는 밭에 감추어 보관되는 경우가 많았다(마 13:44 참고).

예수님은 그 당시의 풍습을 보시고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실 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이 세상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였다(골 2:3).

* ‘밭에 감 추인 보화’ 왜 보화가 밭에 감추어 있었을까? 옛날에는 지금처럼 보물을 보관할 공공기관 같은 것이 없는 시절이어서 부자들은 먼 여행을 떠날 때, 땅에 보물을 감춰두고 여행을 갔었다고 한다. 그럼 어느 부자가 멀리 장기여행을 가면서 보물을 감춰야 하겠는데, 당신이라면 어느 곳에 감출까? 보물이 가득담긴 상자를 문전옥탑 좋은 밭에? 아니면 사람들의 전혀 관심도 없는 척박하고, 엉겅퀴와 돌 짝밭, 산비탈, 어느 후미진 밭? 어디에 감추겠는가?

‘천국의 보화’는 예수그리스도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예수는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오신 분이요, 나사렛의 목수 출신이다. 이런 사람이 어찌 천국의 보화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예수가 보배란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예수를 사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도 보배(진리)는 웅장하고 화려한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천국은 가시적 화려한 조건에 있는 게 아니다. 진리는 감추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둘째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45-46)

* 진주(Pearl)는 연체동물 중 조개류의 체내에 비정상적으로 생성된 구슬 모양의 석회석 응고물로 매끈하고 광택이 난다. 값비싸고 귀한 보석으로 상류사회 여인들의 장식품이나 무역상의 주요 거래 품으로 취급되었다(딤전 2:9; 계 18:1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진주 모양이었으며(민 11:7) 잠언은 특히 고귀하고 품위 있는 것, 꼭 소유해야 할 것을 진주로 상징하여 표현했다(잠 3:15; 8:11). 신약에서도 흠이 없는 진주는 완전함을 상징했으며 격언이나 잠언에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마 7:6; 13:45-46).

진주의 값에 대해서, 성경은 현숙한 여인의 가치와 아름다운 성품, 지혜의 값어치를 설명할 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고 했다(잠 20:15; 31:10).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도 있다. 값진 진주(진리)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리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진주하나를 구하기 위해 장사하는 사람의 갈급함을 아는가? 천국의 진리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화려한 지식이나 명예를 가지고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은 진주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값진 진주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보배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 왜 보지 못할까? 그들의 눈에는 천국의 진주(진리)를 구하려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의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진주를 손에 쥐었다가도 그것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히 많다. 세상 것에 관심이 있으면, 천국의 진주를 보는 눈은 소경이 되는 법이다.

셋째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는 것이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48-50)

* 그물(Net)이란 물고기, 새, 동물 등을 잡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느슨하게 짜여진 천이나 끈으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그물은 배에서 던져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되었다(마 4:18; 요 21:8). 특별하게는 번제단을 보호할 목적으로 번제단 주위에 둘러쳐지기도 했다(출 27:4).

상징적으로 그물은 성경에서 악인의 계략(잠 1:17; 시 57:6), 욥의 고난의 원인(욥 19:6),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호 7:12), 믿는 자들을 노리는 대적자(시 9:15; 140:5; 미 7:2), 다른 나라들을 점령하는 바벨론 군대(합 1:15-17), 세상 끝에 있을 심판(마 13:46-50) 등을 설명할 때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란 말씀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이런 걸 두고 교리믿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는 말은 믿는 무리들 중에서 갈라낸다는 말이다.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왜 이런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눈을 감고 사는가? 곧 닥치는 일인데 말이라는 것이다,..

4) 천국의 제자 된 자들 (51-52)

지금까지 천국 론에 관해서 가르쳐 왔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 하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곡간에서 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51-52)

* 서기관(Secretary)은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한 사람을 말한다(왕하 12:10; 대하 34:13). ‘비서’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왕하 12:10-NIV). 히브리어로는 ‘소페르’(sopher)로 직업적인 필사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계약서를 베껴 쓰거나 문서나 편지를 작성하고 구술(口述) 등을 받아 적는 일을 하였다(렘 32:10-12; 36:4, 18). 바룩은 예레미야가 구술한 예언을 받아 적는 일을 한 서기관이었다(렘 36:18).

그리고 후대에 가서 이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스 7:6; 렘 8:8). 서기관들의 이런 역할 때문에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사, 학자로도 불렸다(스 7:6; 사 50:4). 에스라가 이러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스 7:10).

* 곳간(Treasury)이란, 물건을 간직해 두는 곳 혹은 저장하거나 모으는 곳이다. 성경에는 금 은 동 철 등 보화를 저장하는 곳(수 6:19; 왕상 7:51), 식료품을 두는 창고(대상 27:27; 느 13:12-13) 등으로 적혀 있다. 또한 궁전이나 성전에 있던 창고(왕하 12:18; 14:14; 대상 28:12), 성전 남문 근처에 있던 창고(대상 26:15, 17; 느 12:25), 농민들의 곡식 창고(마 13:30)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새것과 옛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주석가들은 목사들이 이 말씀에 근거해서 신약 복음과 구약 율법을 잘 적용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교회가 복음이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과 율법이 혼합된 기독교란 종교를 만들어온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율법(구약)이 왜 성경전서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이 없이는 예수님을 분명히 조명 받을 수가 없고,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롬 3:20) 성경전서에 포함해서 편집된 것이다. 구약제도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포함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 과거의 그 나라에 대한 역사공부를 해야 현재를 알게 되듯이 구약은 바로 그러한 내용이다.

삼국시대의 법이나 조선시대의 법을 지금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각 나라마다 건국되면서 만들어진 헌법을 기초해서 만든 법을 지키고 있다.

그와 같이 구약역사를 배워야 신약을 아는 것이고, 율법을 알아야 복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만약에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지켜야 한다면 예수 십자가 사건은 불완전한 구속사건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을 알기위해서 보고 배우는 것이지 지키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에 율법이 지금도 지켜야 할 것이라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헛것이 되며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다. ‘복음과 율법을 잘 적용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있는데, 여기서 ‘복음과 율법을 잘 적용’ 이란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 때문에 복음과 율법을 혼합적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과 율법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적그리스도로 봐도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불완전한 사건, 혹은 부인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를 두고 염려스런 문제가 있는 것은 이름과 겉옷만 바꿔 입었을 뿐, 여전히 신약교회에서 율법이 가르쳐 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미래교회를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복음과 율법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한다.

율법은 참고 자료로 배우는 것일 뿐, 복음과 함께 지켜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동일적용이란 이론은 무엇과도 섞여서는 안 되는 순전(純全)한 복음에 물 타기로 변질 시키려는 악마의 음모로 봐야 한다.

5) 배척 받는 왕(53-58)

예수는 갈릴리 사역을 끝내고 고향 나사렛을 찾았다. 그들의 회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가르치셨다. 예수의 가르치심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 회당(Synagogue)은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를 말한다. 회당 제도는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게 되면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행 13:5). 유대인들은 안식일 외에도 회당에 자주 모였는데 남녀가 따로 떨어져 앉았다.

회당의 주된 용도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는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졌다.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를 드린 후 쉐마를 읽었다(신 6:4-9). 쉐마를 교독한 후 다시 기도문을 암송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축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이 손을 들고 민수기 6:24-26로 축도함으로써 예배를 폐했다.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도 드리시고 말씀을 전하셨으며(눅 4:15) 병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셨다(막 1:39). 특히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서를 통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셨지만 배척받으셨다(눅 4:16-30). 바울도 회당 예배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전도하였다(행 19:8). 회당은 율법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눅 13:10) 법정의 용도로도 쓰였다(마 10:17; 23:34; 막 13:9).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 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배척한 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 하시니라’

* 목수(Carpenter)는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기구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목수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라쉬’(charash)는 목공일에 종사하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공업자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이다. 그래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공장’으로도 번역되며 ‘목공’으로도 번역되었다(사 41:7; 44:13; 렘 24:1;29:2; 호 8:6). 또 장색, 철공,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으로도 번역되었다(사 40:19; 54:16; 호 13:2).

두로 왕 히람은 다윗에게 목수를 보내어 다윗 궁을 짓게 하였다(삼하 5:11). 요아스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바친 은을 성전 수리를 위해 목수에게 주었다(왕하 12:11).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목수였으며(마 13:55) 예수님도 목수일을 하셨다(막 6:3).

* 마리아(Mary)는 요셉의 아내이자 예수님과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을 비롯한 예수의 형제들의 어머니이다(막 6:3-4). 히브리어 미리암(출 15:20), 아람어 마리암의 헬라어 음역으로 ‘사랑받는’, ‘높여진’이란 뜻을 가진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의 이름이다.

나사렛 마을에서 살던 그녀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동정녀의 몸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소식을 들었다(마 1:18; 눅 1:26-37).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이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였다(눅 1:38).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바로 사가랴의 집에 가서 엘리사벳을 만났으며 엘리사벳에 의해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받았다(눅 1:39-45).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을 받고 정혼한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다가 어느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눅 2:1-7).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 율법에 따라 낳은 지 8일 만에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였으며 정결 예식을 행하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로 제사를 드렸다(눅 2:21-24). 거기서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다(눅 2:25-38). 누가복음에는 이 모든 일을 마치고 나사렛에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눅 2:39) 후에 헤롯의 유아 살해 명령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 간 것으로 보인다(마 2:13-18). 그 후 헤롯이 죽자 주의 사자의 메시지를 듣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 살았다(마 2:19-23).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며 일행과 떨어진 예수를 찾아 헤매다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고 있는 어린 예수를 발견하였다. 거기서 마리아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눅 2:41-51).

마리아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고 있고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모습을 보아 그 잔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요 2:1-5). 결국 그녀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예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주요 역할을 하였다(요 2:7-11).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오해했던 때도 있었다(마 12:46-50; 막 3:31-35; 눅 8:19-2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마리아는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아픔을 경험했으며, 후에는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제자 요한에 의해 봉양 받았다(요 19:25-27). 예수 부활 승천 후 마리아는 그녀의 다른 자녀들과 120여명의 성도와 함께 기도하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경험하였다(행 1:12-2:4). 마리아는 수세기에 걸쳐 모든 여성 가운데 ‘은혜 받은 자’(눅 1:28)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복 받은 여인이었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자신의 인간적인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양육하여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인내와 사랑, 믿음을 지닌 여인이었다.

* 야고보(James)는 예수님의 친 형제인 야고보(마 13:55; 막 6:3)로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비웃었던 사람이다(요 7:5).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고전 15:7),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는(행 12:17)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으며(갈 1:19), 예루살렘에서 열린 총회를 주관하기도 했다(행 15:13; 21:18). 바울로부터 ‘교회의 기둥’이라는 말을 들었다(갈 2:9).

* 존경(Honor, Respect)이란 다른 사람을 높여 공경하는 것을 말한다(에 1:20). 성경에서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와 주를 존경하는 자를 동일시하며(잠 14:31)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할 뿐 그 마음은 멀리 떠났음을 꾸짖으셨다(사 29:13). 반면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서로 사랑하여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권면했다(롬 12:10).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인물로는 구약의 히스기야 왕(대하 32:33)과 신약의 교법사 가말리엘(행 5:34) 등이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고, 한편으로 슬픔이 복 받치기도 한다. 잘 안다는 것이 배척의 이유가 되고, 가까운 사람이 더 믿지 않고, 무시하고, 배척을 한다. 가족이 믿어주지 않고,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배척을 하고, 과거에 한번 만나고 한번 식사를 나누고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두번 만나고 잠시 커피를 마셨다고 해서 다 안다고 하면 큰 오해일수 있다. 스쳐가는 만남으로 인격과 삶의 내용과 특히 신앙적으로 영적지적인 면을 조금 안다고 하는 이유가 무시의 조건이 되고, 친구와 동창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움이 복받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 하시나라’ 능력은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나타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요소를 묻는 다면 흔히 4가지를 든다. ‘믿음이 뭔가?’ 영접, 인정, 순종, 의뢰라고 말을 한다. 지금 예수님의 고향에서 겪는 수모는 안다는 것 때문에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을 하지 아니한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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