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7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성경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이 가난한 자이다. 당연히 애통함이 있다. 그러하니 구원의 문제에서부터 무엇이 되었든지 하나님께 맡긴다. 온유한 자이다. 온유한 자에게 안식이 찾아온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안다. 이는 삶의 우선순위의 문제다. 정말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안다. 그것은 의의 문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인격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성경에서 의란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기독교는 관계를 다룬다. 나의 평안함을 위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더라도 관계의 회복을 위해 나를 희생하더라도 관계를 극복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문제가 되는 죄의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가져왔다. 이것이 기독교다.
로마서 1:17에 보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기독교의 대명제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의인’을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 그래서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해석해 버리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인’이란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란 의미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로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다. 상업의 행위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신뢰다. 이렇게 너와 내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너와 나 사이에 믿음이 깨져버리면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관계가 좋으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믿어주고자 한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참으로 다양하다. 가족과의 관계, 상업상에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 학교에서 어떤 모임에서 친구 관계로 또는 이성관계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이 어떤 사람과의 관계보다 우선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든지 똑같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맺는 관계가 있다. 이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주리고 목마른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에 대한 요구를 의미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마시는 문제는 참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내가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수가성의 여인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인이 물을 얻기 위해 우물가에 나온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때 여인은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유대 사람이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로 여기고 있는 관계이다. 물은 누가 되었든지 아주 필요하다. 그런데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유대인의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물을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하고 관계로 답을 하신다. 그리고 갑자기 상황의 반전이 일어난다. 여인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았다면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의 남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신다. 남편이 죽었든지 아니면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든지 현재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 여인은 한 남자에게 안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재 함께 사는 남자는 그나마 남편이라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여인의 진정한 목마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안주할 주 있는 한 남편이었다. 이 남자도 죽어버릴까? 아니면 자신이 또 이 남자로부터 내침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과 염려가 그리고 두려움이 언제나 여인의 삶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여인은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자신이 만난 메시야 예수님을 선포한다.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은 갈증을 느낀다. 우리가 가지는 가장 큰 고통은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다. 어쩌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그렇게 소원하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없애고자 함에 있을 것이다. 더 많이 가지게 되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내가 갑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 관계가 틀어졌을 때 오는 고통을 최소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돈에 대한 갈증이 있다. 여기에 성경은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정답은 하나님에게 달려가는 것이다고 말씀한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고 그래서 염려와 걱정이 있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은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우선순위 문제를 끄집어낸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진정 목말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진정 염려해야 하는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달려가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 왜냐면 하나님 은혜에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팔복의 4번째 인격은 5번째부터 이어지는 타인과의 관계의 연결고리가 된다. 우리의 진정한 갈증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행복에의 갈증을 가지고 있다. 진정 행복해지고 싶다면 너와의 관계를 바로 맺어야 한다. 한데 그것이 싶지 않다. 상대방과 바른 관계를 행복한 관계를 가지고 싶다면 팔을 안으로 굽히는 것이 아니라 팔은 상대방을 향하여 뻗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싶지 않다. 왜냐면 내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상대방이 내게 대하는 행위나 말이 더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언제나 상처를 받는 쪽은 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자는 남을 도울 수가 없다. 왜냐면 내 배고픔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경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간단히 말하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한 염려를 그만 두고 하나님에게 달려가라. 이것이 4번째 팔복의 요지다. 특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라. 다 잊어버려라.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 내가 하나님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생각하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생각하라. 그리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내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높고 깊고 넓으신 사랑에 배부르라. 그것이 정답이다. 배부르면 여유가 생긴다. 비로소 상대방이 보인다. 억지로 사랑할려고 하다가는 또 하나의 상처가 생길 것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면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모욕도 당하고 죽을 고비까지 당하는 것을 친구들이 보면서 바울보고 미쳤다고 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울은 모든 면에서 잘난 인생이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라고 하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5:13-14)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끌어가시니 내가 매를 맞아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에 배부르게 되면 너가 보인다.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그러기에 문제가 생기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