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0
화평하게 하는 자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이란 하나님나라 백성의 인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인격, 그 결정체가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기독교인은 화평하게 하는 인격자로서 세상 안에 들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가 될 것이다. 팔복은 7번째 화평하게 하는 자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로 요약될 수 있다. 바른 신앙인격(하나님과의 관계)을 갖추지 않으면 화평하게 하는 일이 피곤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억지로 흉내를 내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어서의 절정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녹아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단지 지식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달되어 그 은혜와 사랑으로 녹아든 가슴이 세상을 향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격을 갖추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인격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긍휼함과 청결한 마음은 결국 화평하게 하는 자의 인격자를 만들어 낸다.
팔복의 결정체는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팔복의 일곱 번째 인격은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평화롭기 때문에 평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기에 그 사랑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미움이 있는 그곳에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이다. 싸움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 반면에 어떤 자는 싸움을 멈추게 한다. 성경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화해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도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를 도발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시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걸머지고 십자가로 향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자가 되셨다. 화평하게 하는 자였다. 평화를 만들어내신 자였다.
이삭은 화해의 모형이 된 인물이었다. 이삭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문제가 있었을 때 스스로 화해의 제물이 되었다. 물론 이삭 대신에 양이 제물이 되었지만 결론적으론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화해를 이루게 하였다. 물이 귀한 가나안 땅에 우물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삭은 열심히 우물을 만들었지만 이웃 주민과 논쟁이 있었다. 이때 이삭은 할 수만 있다면 이웃과 평화롭게 살고자 하였다. 이삭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상황에서도 서로 화평하게 지내는 길을 택했다. 결국 이웃과의 우물논쟁은 막을 내리고 서론 공존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삭은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형 에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동생 야곱이 속임수로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기고 야곱을 어찌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는 동안은 참기로 했다. 그리고 그 참았던 그 시간들이 결국 에서와 야곱의 화해로 이어졌다. 이렇게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랑의 다른 용어가 화평이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다르다. 자비란 있는 자가 없는 자를 향하여 하는 것이다. 마음이 넓은 자가 마음이 좁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비다. 그러나 사랑은 없는 자도 있는 자에게 할 수 있다. 마음이 좁아도 사랑을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내 마음이 너를 좋아하기에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하시는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이라고 하셨다. 이는 화해를 말하는 것이다. 화평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화평이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모호한 것이 없다.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자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을 모른다고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화평케 하신 자이다. 요한일서 5장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조심할 것이 있다. 화해 또는 화평이 좋은게 좋은 것이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화해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만은 분명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은 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칼이란 잘라내는 것이다. 그만큼 분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명 또는 명령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첫째란 우선순위의 문제다.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없는 그 다음은 없다.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혹은 말한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바로 사랑하지 못한다고. 이것은 거짓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본능의 문제다. 자격지심조차도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나의 자격지심은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의 자격지심에 대하여 긍휼이 여김이 없다면 문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먼저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온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화해의 방식이다. 어떤 곳에든지 싸움을 만드는 자는 아직 철이 안든 자이다. 화평하게 하는 인격자가 진정한 철든 기독교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
예수님의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되심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제물이 되셨을 때 증명되었다. 누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노라고 고백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 아들의 길은 화평하게 하는 길이었다.
화평하게 하는 자를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우리는 이미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했을 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게 된다(요한복음 1:12). 만일 하나님이 화평하게 하는 자를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준다면 이것은 행위적인 구원이 될 것이다. 팔복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이유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십자가를 의비하고 하나님께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간 자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다. 쉽게 말하자. 화평하게 하는 자를 세상은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참된 기독교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당신은 진짜 기독교인이네’ 이런 말이다. 오늘 툭하면 싸움으로 점철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돌아보아야 할 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롭기 때문에 그 평화로움이 묻어가는 자가 아니라, 싸움과 분쟁이 있는 그곳에 화평을 만들어내는 자이다. 네가 나를 좋아하기에 너를 좋아하는 자가 아니라, 네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너를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는 자가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이런 자를 향해 세상은 참으로 당신은 참 기독교인이라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