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난다. 천국이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이다. 팔복에서 복이란 행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 곧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삶에는 행복이 있다. 행복은 얼마나 소유하고 무엇을 성취하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에 있다. 너와 내가 어떠한 방향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가? 어떠한 방향으로의 관계 형성, 이를 성경은 인격이라고 부른다. 팔복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인격에 관한 것이다. 두 종류의 인격을 다룬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신앙 인격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하며, 온유함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웃(타인)에 대하여 긍휼히 여김으로, 마음을 청결하여, 화평을 만드는 자로, 결국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그럼 팔복의 마지막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란 어떠한 인격자를 말하는 것인가?
8번째 팔복의 의란 이웃(타인)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팔복에는 두 번의 “의”가 등장한다. 4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8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이다. 여기에서 의란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4번째 등장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8번째 등장하는 의는 이웃(타인)과의 바른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5번째부터는 이웃과의 관계를 다루는 선한 인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긍휼히 여기사 죄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화목제물로 주셨다. 이렇게 5번째부터 8번째까지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로 사랑하는 자가 비로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또는 은혜에 배부른 자가 타인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8번째 갖추게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선한 인격은 상대방과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희생하는 자를 의미한다.
팔복의 절정은 7번째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평화가 있는 곳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미움과 싸움이 있는 곳에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이다. 화평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내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다. 나의 희생이 없이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싸움이 멈추지 않는가? 나의 희생은 없고 상대방의 희생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짐조차 내가 지고 마침내 화평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팔복의 마지막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과정이다.
기독교는 본의 이어감이다
보여지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말만 있고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으면 요란한 빈 강통일 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선생된 자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 13:15)고 말씀하셨다. 또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명령하신다. 이 두 구절에서 공통적인 면은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4:7-11에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예 하나님 자신이 사랑 그 자체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말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7절과 11절에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논리적인 답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화해가 이루어졌는가를 말씀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되 우리 죄를 속하게 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기까지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보여주셨다. 그래서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나님의 보여주신 사랑을 이제는 스스로도 본으로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여주신 사랑이 단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길로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천국은 죽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화해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는가를 바로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똑같은 방식 곧 하나님이 본이 되어 보여주신 그 방식과 방향과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도저히 상대하기 싫은 너에게 다가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에 들어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16:23,마가8:34,누가9:23)고 하셨다.
팔복에서 자기를 어떻게 부인하는가를 1-4번째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5-8번째에서 말씀하신다. 그 과정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미 보여주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자신이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과 방향과 모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방식과 방향과 모습의 본으로 주어졌다. 그것은 우리로 행하게 하려함이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 11:1)고 말한다. 기독교는 이렇게 본을 보이며 그것을 이어가라고 한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그 결과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며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나라 백성은 화평하게 자로서 너와의 바른 관계를 위하여 내가 그 짐을 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천국의 완성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행복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내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고 예수님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예수님처럼 온전히 받은 것 없이 마냥 주기만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 받은 것이 없이 주기만 하면 이내 지쳐버린다. 이것은 강요다. 강요된 인격은 어는 순간 도태되어버린다. 그래서 팔복은 4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배부른 자가 되지 않으면 5-8번까지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미 배부르게 받았다는 전제에서 너와의 바른 관계(의)를 위해 내가 박해를 받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힘이 안든다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인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 자신도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길이었음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보여주셨다. 그래도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기에 기꺼이 그 어려움을 극복해 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 된다. 당연히 여기에는 하나님의 지켜주심이 있다.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피해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시며 하나님이 분명한 보상이 있게 하신다. 그것은 부활이다. 내게는? 행복이다. 너와 나의 관계가 변한다. 하나님나라는 에덴을 포함한다. 바른 관계의 회복, 참된 행복의 완성이다. 팔복의 내용은 하나님나라 백성이 가져야하는 인격의 본질이다. 그 결과 행복된 삶의 전개이다. 당연히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다스려 주심으로, 되게 하시며(becoming), 극복하신다. 그렇게 천국은 행복은 내 삶 그 자체가 된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