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읽기 12

by wgma posted Jan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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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읽기 12

 

교회와 세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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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일차적으로 12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이들 12제자들은 앞으로 세워지는 주님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나라 백성 곧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가 갖추어야 하는 인격의 특성에 대하여 선포하심으로 시작하신다. 이것이 팔복의 내용이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한다. 세상이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속하고자 하는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고 조롱하며 도전하는 세상 안에서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

 

교회는 세상을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 어떤 자와 관계의 문제가 발생할 때 가장 쉬운 길은 문제의 당사자와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러면 평안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면 먼저 도피할 생각을 한다. 이를 좋게 말해서 마음을 비운다고도 하고 욕심을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관계를 끊음으로 자신의 마음만을 평안해보고자 함이다. 평안함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관계에서 온다. 기독교는 불편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여 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 행복해지고자 한다.

때로는 세상을 등지는 믿음의 공동체 집단을 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의 수도원이다. 이들의 모습이 숭고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수도원주의 운동을 권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3장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교회의 성도는 세상에 심기어진 복음의 씨앗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교회의 긴장이 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거룩함 곧 세상과의 구별이 있어야 한다. 이 구별이 없어지면 그것의 교회의 죽음이다. 여기에 세상 안(in the world)과 세상과 더불어(with the world)는 구별해야 한다. 세상 안에 있으되 세상과 더불어 가지 않는다(in the world but not with the world)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 곧 교회의 모습이다. 이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를 조롱한다

 

마태복음 5:11-12은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모습이다. 이는 교회가 세상 안에 있되 세상과 다름으로 당연히 주어지는 모습이다. 교회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세상은 언제나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중심의 세상과 하나님중심의 교회는 대립 관계에 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한다. 세상은 인간을 위한다면서 바르지 못한 길로 나아간다. 낙태가 시술되고 간통죄가 폐지된다. 이제는 비정상적인 동성애가 마치 인권을 위한 길인 것처럼 포장된다. 인간이 보기에는 바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 여기에 교회는 부패를 막는 소금의 삶을 통해, 어두움을 비추어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촛불의 삶을 통해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사명이 교회에 있다. 소금이나 빛의 공통된 점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싫어한다.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다.

초대 교회의 시절에는 교회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관직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거나 불에 태어 죽기까지 했다. 지금도 이러한 박해가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 있다. 그러나 한국이나 미국의 교회는 타협이란 미혹에 빠져있다. 세상과 더불어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가 세상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변질시켜가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 참된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설 자리가 없어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지키고자 하는 자는 배타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예수님 때문에 부자가 되고 좋은 학교에 가고 권력을 누리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처럼 포장되는 지금의 시대에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바로 믿어보기 위해 때론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권력의 자리마저 버린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처럼 취급당하는 시대이다. 마태복음 5:11-12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잃었는가?” 이것이 교회의 간증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왜냐면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12절은 분명히 이 땅에서 주어지는 상급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급이다. 복의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구약에 집착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물질적으로 부자였다. 요셉은 한 나라의 총리가 되는 권력도 누렸다. 욥은 그 엄청난 고난 후에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을 받았다. 그러면서 복의 개념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게 취급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태 8:20, 누가 9:58)라는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실제적인 복의 개념에서는 구약으로 돌아가 버린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실제로는 헌금의 액수를 따지는 것이 현실 교회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의 모습과 다른 바 없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는 절대 잃어버리면 것이 있으면 그것은 믿음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강박감이 한때는 기독교 연애들이 자살을 택한 이유였을까? 자살하는 연애인 중에 왜 유독 기독교인이 많은가? 교회 내에서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봉사 활동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투쟁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의 답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잘되는 것이 내 영혼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오해가 팔복에서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복을 잘못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주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상급이란 것은 경주자가 그 모든 경주를 마친 후에 주어진다. 그래서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4)고 한다. 마태복음 6장은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1-2) 물론 경주하는 자가 바로 달리기 위한 체력을 하나님이 주신다. 그 체력이 어떤 자에게는 물질로, 이름으로, 권력의 자리로, 재능으로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끝까지 달리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경주가 끝난 후에 상급이 있다.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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