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등에서 무차별적인 잔혹과 살육을 저지르는 IS가 마침내 지중해를 건너 리비아로 확산되었다. 리비아에서 활동하며 IS를 추종한다고 주장하는 무장괴한들이 이집트 기독교인 21명을 참수하는 동영상을 15일 인터넷에 올렸다.
희생당한 이집트인 대부분은 리비아에서 일하던 가난한 이집트 노동자들이다. 이집트 콥트 기독교 지도자인 안바 에르미아 교황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희생당한 21명을 순교자라고 공표했다.
이집트 콥트정교회 수장인 안바 에르미아 교황의 페이스북 계정에 실린 사진.
또 이집트의 엘시시 대통령은 자국민들이 희생된 데 대해 보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요르단 조종사가 희생당한 보복으로 요르단 국왕이 IS근거지를 맹폭격한 선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집트 인구의 90% 가량이 이슬람 수니파인 이슬람국가이다. 하지만 이집트가 전통있는 중요한 기독교국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이집트의 기독교 종파를 콥트교라고도 한다.
콥트라는 말은 아랍어의 깁트를 영어로 표현한 것. 아랍어로 깁트는 이집트 사람을 말한다. 콥트정교회 신도들 수는 현재 이집트 전체 인구의 12~15%, 최대 1200만명 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집트에서는 현대에도 수천 개의 교회에서 예배가 열리고 있다. 콥트 정교회 신도들의 숫자는 20세기 후반기부터 증가세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집트 콥트정교회는 아프리카 각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근거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일부 콥트 정교회 신도들은 이집트 이슬람정권의 차별을 피해 미국 , 호주 등으로 이주해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해 살고 있다.
현재 카이로에 위치한 Cave Church(콥틱교회)
이집트와 기독교와의 역사는 성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헤롯왕은 어린아이들을 전부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살인명령을 피해 예수 일가족, 즉 어린 예수와 성모 마리아, 요셉이 몸을 피한 곳이 이집트였다.
다음 이집트에 기독교의 씨를 뿌린 사람이 바로 최초로 복음서를 기술한 마가(Mark)이다. 마가는 예수의 행적을 전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인이다.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도 나오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마가의 집 다락방이었다. 이후 마가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따라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전승에 따르면 로마에 있을 때 천사의 지시를 받고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집트에 가서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구두장이 아니아누스이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돌길을 걷다가 신발끈이 다 낡은 것을 발견하고 구두장이 아니아누스에게 가서 수선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아니아누스가 구두를 수선하다가 송곳으로 자기 손을 찔렀다. 이때에 아니아누스는 “하나님은 하나다”라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마가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 이후 알렉산드리아 기독교도의 수는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독도 기독교도가 된다. 마가는 여러 명의 사제를 양성하고 교회 건물을 세웠다.
갑자기 커가는 기독교회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 기득권층은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68년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행사를 치렀다. 로마 다신교를 믿던 주민들은 축제를 벌이고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던 마가를 붙잡아 가서, 목에 밧줄을 묶은 후 길거리로 끌고 다닌 다음 밤중에 옥에 가두었다. 마가는 감옥에서 천사를 보았는데, 그가 순교할 것임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그는 다시 이교도들에 거리에서 끌려다니다 절명했다. 광분한 군중들이 마가의 시신을 태워버리려 시신에 불을 놓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이때 마가를 추종하던 교인들이 모여들어 잿더미 속에서 그의 시신을 꺼냈다. 시신은 기적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교인들은 시신을 교회로 운구하여 수의를 입힌 후 기독교의 의식에 맞추어 장례를 치렀다. 교인들은 그의 순교가 길이 기억되기를 기원하면서 교회 동편에 그를 묻었다.
기독교에서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이자 가장 권위있는 복음서의 기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성인의 등급을 따지자면 최고위 등급이다. 베네치아의 융성에도 마가 성인의 공헌은 지대하다. 828년에 마가의 유해가 발견되자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그의 유해를 돼지고기를 담은 바구니에 담아 베네치아로 밀반입하였다. 이슬람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이 유해를 모신 곳이 바로 유명한 산마르코 성당이다. 이 사건 이후 마가 성인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최고등위의 수호성인을 둔 최고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마가성인이 선교활동을 펼치고 순교한 지역인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도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이집트 콥트교가 2천년 이상 맥맥히 유지되어 오는 데에도 마가성인을 신앙적 기원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콥트정교회는 그리스인, 유대인, 이집트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한 뒤부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콥트정교회는 황금기를 맞았다. 콥트정교회가 지은 수도원들은 교회의 연구나 수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단성설을 신봉하는 콥트교는 451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 등을 둘러싼 교리 논쟁 끝에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와 분리되었다. 하지만 정교회의 의식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교황이 있고 주교들이 있으며, 교황은 주교회의에서 선출한다.
이집트 콥트 정교회 성당의 예배 광경
이집트의 콥트정교회 신도들은 639년 아랍의 이집트 정복도 별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콥트어 대신 아랍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며, 기독교도들은 신앙을 지키는 댓가로 지즈야라는 세금을 내야했다. 이후 콥트정교회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변덕이 심한 이슬람 슐탄들은 기독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공직임용을 거부하고, 심한 경우 국외로 추방하는 경우도 잦았다. 다만 십자군을 물리쳐 이슬람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통하는 살라딘은 콥트정교회 신도들을 공직에 임명하는 등 차별을 줄이려 노력하였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를 점령한 뒤에 콥트정교회는 또다시 장기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 최근의 사다트 전 대통령과 무바라크 전 대통령 같은 친서방적이고 세속적인 군사지도자들도 콥트정교회 건물 신축을 금지하고, 콥트정교회 신도들의 공직임용을 막기는 마찬가지였다.
콥트정교회 신도로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외무장관이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콥트정교회 신도들은 군사독재자들에 대해 소극적인 지지를 표했다. 극단주의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을 억제하여 콥트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을 줄이는 효과를 기대한 때문이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 축출 시위사태가 벌어졌을 때 콥트정교회의 셰누다 교황은 무바라크를 지지하며 신도들에게 반 무바라크 시위에 나서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상당수 콥트정교회 신도들이 반무바라크 시위에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재자가 축출되고 이집트에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분위기가 휩쓸면서 콥트정교회들의 처지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2011년 1월1일 콥트정교회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알 키디신교회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자정 미사를 끝내고 나오던 콥트 정교회 신도 21명이 사망했다. 키디신교회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60개의 콥트교회가운데 가장 큰 교회이다. 이 테러사건 이후 콥트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테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강경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여성들의 문제에는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도 남성과 이슬람교도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은 금기이다.
이슬람 여성과 사귀던 기독교도 남성이 콥트정교회 교회로 피해 달아나자 무슬림들이 몰려들어 그 남성을 끌어내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을 죽이자'며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도들의 살림집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등의 사건이 빈발했다.
이처럼 콥트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테러의 배후로는 이슬람근본주의적인 살라피파가 지목되었다. 이집트 정부는 이슬람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법으로 금지시켜 놓은 상태.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무조건 이슬람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길거리에서 기독교 관련 선교활동을 하면 구속된다.
콥트정교회 신도들이 원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평등이 인정되고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자유롭게 교회를 지을 수 있고, 콥트정교회 신도들 나름대로 결혼, 이혼, 상속에 대한 기독교원칙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다.
이집트 콥트정교회와 그 신도들은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힘들게 생존해 왔다. 이번 IS의 이집트 콥트 정교회 교인 21명 참수 사건은 기독교 문명권인 서구에는 물론 이집트 정부와 대중들에게도 종교간의 공존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숙명처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