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3
교회와 세상 2
[마태복음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1은 세상이 하나님나라 백성 곧 교회를 대하는 태도이다. 등장하는 단어는 박해, 거짓, 악이다. 이 단어들을 보면 노아 홍수의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5) 하나님나라의 백성 곧 교회는 이러한 세상과 떨어져서 고고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가진다.
세상이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
하나님나라 백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어떠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가?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이다. 하나님은 세상이 교회의 착한 행실을 보는 것을 원하신다. 착한 행실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는 착하다 또는 선하다는 것은 살리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행실이란 것인데 여기에서 행실이란 무엇이 되어서(to be)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다. 돼지가 돼지의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돼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무엇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 곧 기독교인은 그 자제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소금이기에 소금의 행실이 나오고 빛이기에 빛의 행실이 나온다.
그런데 소금과 빛의 모습은 세상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등장한다. 이는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아내에 대하여는 남편이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또는 아들이 되고 세상에 대하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답게 나타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빛으로서 나타나 보여져야한다. 그렇게 교회가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된다.
소금과 빛의 모습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어져 가는 것
세상의 모습은 거짓과 악이다. 물론 스스로는 참이고 사는 길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이 보시면 거짓이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이러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썩어져 가는 것을 막고 세상의 빛이 되어 바른 길 사는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이 교회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썩음을 방지하고 어둠을 비취이기 위하여 자신은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남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으로 멀어져 가는 것을 막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기독교가 가지는 최고의 역설은 “죽어야 산다”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기까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이다. 골로새서 4: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내가 돋보이고자 하는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을 살리고자 하는 대화의 모습이다.
세상은 교회가 어떠한 자인 줄을 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과 더불어 가지 않는다. 이를 교회의 거룩함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서 살지만 믿지 않는 자와 구별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별된 무엇이 소금과 빛이다. 세상은 믿는 자가 이미 소금이며 빛인 줄을 안다.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내가 소금이며 빛인 줄을 안다. 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교회가 소금이고 빛이 됨을 안다. 믿지 않는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더라도 세상이 다 그런거야 라며 넘어갈 수 있지만 믿는 자가 거짓을 말하면 세상은 책망의 소리를 발한다. 당신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당신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이미 소금이며 빛임을 세상은 안다. 빛은 제 아무리 가린다 해도 바늘의 구멍만 있어도 빛은 그 구멍을 통해 발산된다.
소금이 필요해서 소금을 찾는다. 그런데 소금에 짠 맛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방 안에 불이 꺼져서 라이터를 찾았는데 불이 켜지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그리되면 그 소금과 라이터는 버려진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악을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세상에서 하지 않으면, 교회가 세상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면 교회는 버려진다. 베드로전서 2:9에서는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교회는‘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포한다. 왕이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이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중재하는 자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세상이 악하게 흘러가는 것은 교회에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세상이 악하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함이다. 세상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습으로 흘러감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교회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이다. 세상은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임을 안다. 세상은 소금이 필요하고 빛의 필요성을 안다. 그렇게 세상은 교회를 바라본다.
교회여 거룩하라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거짓으로 거슬러 악한 말을 한다 하더래도 교회는 세상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그렇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거룩성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더불어 가지 않는 그 거룩성(구별성)이야 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의 한 단면으로 나타나면 안된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을 선포한다.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감을 방지하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도록 하는 소금과 빛의 사명이 교회를 교회답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