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4
율법의 정신
김성철 목사(예승장로교회 담임)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나라의 백성, 어떻게 살 것인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팔복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이 갖추어야 할 인격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나라 백성과 세상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 백성이 살아가야 할 원리(5장) 목적(6장) 그리고 기준(7장)에 대해 말씀하신다. 먼저 하나님나라 백성이 살아갈 원리는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자처했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취한 태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곧 율법의 정신은 알지 못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온전하다”는 말은 목적한 곳까지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장성하다”로 번역하곤 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중심으로 율법을 주신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킬 때 그 율법이 지닌바 정신을 가지고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등으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선언하신다. 무엇으로?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서 13장에서“(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다. 율법의 정신은 악을 행하는 것 곧 율법으로 이웃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 곧 이웃을 살리고자 함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법이 없다면?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세기 6:5)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모욕적인 말만 들어도 죽여버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법이 주어진다. 상해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도록 했다. 몸이 상한 것은 상한대로만 갚음으로 더 이상 해를 주지 않도록 하고, 절도죄의 경우에는 두배 세배 네배로 갚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란을 막고 질서있는 세상살이가 되도록 하는 것이 법의 역할이다. 문자적인 법대로 했다면 인간은 모두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라도 보내어 그를 십자가에 죽게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한 것이다. 율법의 시작도 과정도 마침도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살리고자 함에 그 정신이 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율법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십일조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예수님은 오직 사랑만을 말씀하셨다고 하신 자들은 마태복음 5장을 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1:42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구절에서 십일조는 바칠 필요가 없다고 읽는다면 그건 자신이 원하는대로 읽은 것이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가진 정신도 살리고 그 정신의 형식 역시 지켜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내용과 형식을 다 중하게 여긴다.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은 형식으로 나타나게 마련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위선일 뿐이다.
십일조가 가지는 의미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십일조라는 형식으로 나타내 보이게 된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린다는 이유로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의로 여기며 하지 못한 자를 비교하여 죄인 취급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 된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며 기도했다. 그의 기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런데 문제는 “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태도에 있었다.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고 선포했다. “완전하다”하는 말은 “가득 채우다(fulfill)”는 의미이다. 율법의 형식 이전에 율법의 정신으로 율법을 채우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이 그냥 말로만 끝낸 것이 아니다. 이어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다.
여기에서 “이루신다”는 것은 율법이 “행하여진다(done)”는 의미로 율법이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자 빛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그래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적어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보자고 애를 썼다.
어떤 이들은 꼭 주일에 교회가서 예배해야 믿는 자인가하면서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시했다. 물론 주일에 교회에서 함께 모여 예배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고백하는 자는 때론 현재 교회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주일을 지키는 신앙을 유지할 것이다.
여기에서 “의”란 말은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자는 사랑이란 정신을 가지고 주어진 율법에 주어진 내용을 지키고자 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라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무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랑으로 율법의 정신과 내용을 다 이루셨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재 해석
마태복음 5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나온다. 하나님의 법은 단지 행동으로 드어난 것 뿐 아니라 생각으로 범한 것조차 따진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15에서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뜻하신 바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어느 누구도 율법을 어기지 않는 자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율법의 행위로만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없다. 드러난 율법의 행위를 채워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으로만이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게 하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남을 행해서는 살리고자 법을 적용하고 자신을 향해서는 율법 앞에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자신의 문제를 맡기는 자, 이런 자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이다.
월드미션뉴스 김한나 기자 churchus2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