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1)은밀히 보시는 아버지와 (2)상 주시는 아버지로 말씀하고 있다.
(1)은밀히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3)와 연관되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 곧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구제함과 기도는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2)상 주신다는 말은 갚아주신다는 의미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구제에 있어서는 선한 일을 한 대가를 주신다는 것으로, 기도에 있어서는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으로 구체화 된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구제는 이미 사람들에게 그 대가(칭찬과 존경)를 받았으니 하나님이 따로 줄 것이 없다고 하시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기도는 사람들이 알아준 것으로 이미 응답되었으니 하나님이 따로 줄 것이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 두 가지보다 본질적인 하나님의 모습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는 의미다. 이름은 그 자체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면 따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둘만 되어도 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김씨 또는 박씨등 호칭을 붙인다. 김씨 성을 가진 자가 여러 명 있으면 김00, 김xx 등으로 이름을 구체화 시켜서 서로를 구별하여 부른다.
나는 사람이다고 할 때는 사람이 아닌 그 무엇과 비교하여 구별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할 때는 사람의 사람다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다움이 사라지면 짐승과 다른 바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주기도문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기도의 대상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그 이름다움이라는 것이 기도하는 자에게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기도하는 자가 원하는 대로 취급해도 되는 그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다. 주기도문 말미에 등장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이제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함에 있어서 두 가지를 제시하셨다.
(1)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골방에서 기도해도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오해하지 마시라. 골방에서만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든지, 그냥 마음으로만 소리내지 않고 기도하든지, 산에서 기도하든지, 문 닫아걸고 골방에서 기도하든지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2)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알아듣지 못할까 싶어서 한 말 또 하고 반복해서 할 필요 없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다.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이미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고자 하는지 아시고 이해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아버지다. 이는 관계성에 대한 이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우리를 자녀로 여기시고 들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마음을 마태복음7:9-11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구절을 변형시켜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가 생선이 아닌 뱀을 달라고 하면 그냥 뱀을 주겠는가? 자녀가 잘못된 것을 달라고 한다고 주라는 대로 다 줄 수 있겠는가?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우리”이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도 되시지만 너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사실이다. 오직 나만을 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라고 기도할 때도 “우리”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오직 나만의 하나님이 되셔야만 한다고 지독하게도 하나님에게 다가갔던 인물이 구약에 나온다. 그가 야곱이다. 야곱에게 보이는 특징은 내 하나님, 내 소유, 내가 사랑하는 아내, 내가 아끼는 자식. 그래서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움켜지면서 살았던 야곱이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뺏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독차지 해버린다.
물론 하나님께만 매달려 오직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잘 한 일이었지만, 그 결과 야곱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야곱은 우리가 함께 함으로 오는 행복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잃을 수도 있는 인생의 길이 있음을 13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알게 된다. 비로소 행복한 삶에 자신이 걸어온 삶이 험난한 세월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 우리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버지”라는 이름에 표현되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하늘에 계신” 만일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내 멋대로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이렇게 들었다. “하나님나라의 주인(왕)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냥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의 왕이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이 땅에서 육신의 혈연으로 맺어진 아버지와는 분명히 구별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나라를 다스리시는 주인으로서의 아버지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이름을 기억해 낸다. 하나님나라의 주인(왕)으로서의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엘로힘)이시고 자신과 관계를 맺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시는 언약의 하나님(여호와)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엘로힘되시며 여호와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다가오신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늘에 계신(하나님나라의 주인 왕으로서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한 아버지의 뜻이 그의 자녀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기도문에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원하심이 뜻이 들어나 있다.
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20
우리를 다스려주옵소서
[마태복음 6: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할 까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다스림에 관한 기도다. 전반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이고, 후반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로 다스리며 살게 하옵소서’이다.
인간의 자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며 주신 사명은 “땅을 다스리라”(창세기 1:26-28)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관리하는 자리를 인간에게 사명으로 주셨다. ‘다스리는 자’란 ‘자유자’란 의미를 가진다.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다른 그 무엇에 끌러가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자이다. 끌러가는 삶이란 종의 삶이다. 다스리는 자의 삶은 자유자의 삶이다. 성경은 종의 삶을 살지 말고 자유자의 삶을 살라고 말씀한다.
땅을 제대로 다스리고 살기 위해서 인간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다. 주권이란 주인됨의 권리를 말한다. 땅을 다스리며 살도록 주어진 인간의 권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주어진 권리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자리는 2인자의 자리다. 1인자인 주인의 자리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이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표현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땅을 다스리며 땅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관리자 또는 청지기로서 땅을 다스리는 자이다. 성경은 ‘왕’의 개념을 대표자 원리로 설명한다. 왕 한 사람 안에 백성 모두가 들어 있다. 왕이 다스리는 이스라엘 국가가 시작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왕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왕이 바로 행하면 백성이 복을 받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왕이 잘못 행하면 백성이 벌을 받는다. 이러한 왕의 자리가 땅을 다스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리이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에 도전한다. 하나님의 간섭없이 땅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주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청지기의 자리를 이탈하여 스스로가 하나님(주인) 됨을 선언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아닌 인간 모두가 각각 자신이 보기에 좋은 삶을 살기로 했다. 이것이 인간 타락 사건이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한 인간은 땅에 속한 것들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주인으로 살기 원했던 인간에게 찾아 온 것은 종의 삶이었다.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에덴(행복)의 울타리가 되 주셨던 하나님을 거절하자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돈 또는 권력등의 성(城)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쌓은 성의 종이 되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사사기 21:25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인간끼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을 지켜 줄 여유가 없다. 나를 지키기 바빠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의 자리에 서 있게 해달라는 기도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이는 창조세계에 주어진 삶의 자리 땅을 다스리는 자의 삶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라’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성경이야기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다.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가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이란 행복의 울타리란 의미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울타리 되어 주시는 행복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6:33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원)하신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기도의 기본이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조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기도를 이끌어 가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하늘 곧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신 바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되풀이 되는 문장을 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뜻하신 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말씀으로 하신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원하신 바대로 [뜻대로] 되었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이루어지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원함이 말씀하신 바가 땅에서도 이루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땅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가정이고 직장이고 교회이고 모임이고 단체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특징짓는 창세기 12: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이 행한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그 지역의 권력자에게 바친 사건이다.
한번은 애굽의 왕에게, 또 한번은 그랄 왕에게 그리 하였다. 그리 하였던 이유는 이렇다.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세기 20:11) 이중적 신앙생활의 본보기다. 교회나 믿는 자들 가운데에서는 말씀을 따라 믿음의 모습을 보이지만,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또는 말씀을 따라가면 손해가 날 것 같은 생각에서 교회 안에서는 말씀을 따라서 교회 밖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 사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고는 교회의 문을 넘어 삶의 현장에 들어왔을 때는 말씀은 접어두고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에 기도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분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어디에서든지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고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게 해달라고. 우리가 보기에 좋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에 좋은 삶을 살아가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7-9)
김성철 목사(예승장로교회)
월드미션뉴스 김한나 기자 churchus2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