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목사 [히메지비젼교회]
사순절에 주님에 대한 갈망과 임재를! 오늘이 3월 첫 째 주일, 3월 봄소식과 함께 청춘을 이야기 하는 생동하는 봄입니다. 그리고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늘 해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주님에 대한 나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되새겨보는 기간인데 되도록이면 2016년 사순절을 주님에 대한 소망과 우리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더욱 견고히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아모스9;15이하에 똑같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입장에서 아모스보다 신약 쪽이 더 명확한 부분이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을 위하여 위대한 복음을 전하고 이 것을 예루살렘 교회와 장로들에게 설명을 하는데 기적적인 역사와 주님이 이루신 경이로운 결과를 듣고, 오늘 야고보가 시므온의 이야기와 선지자들이 하신 말씀이 이루어 졌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현 상황을 진단하기를 아모스가 예언했던 그 내용이 이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무너진 천막,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예언을 할 때는 그 일을 이루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수축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첫째 왜 하필 다윗의 천막인가? 입니다. 둘째 무너진 다윗의 천막에 대한 해답과 지금의 여러분과는 무슨 상관이 있고, 우리는 괜찮은가? 셋째,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되는가? 거기에 대한 말씀이 오늘 본문과 함께 아모스서에 나와 있습니다.
1-1. 먼저 아모스서 9;11-15절의 말씀입니다. 아모스서에 기록된 말씀은 무엇을 위하여 기록이 되었나요? 아모스의 오늘 본문에는 제목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타이틀이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들의 회복입니다. 그러니까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먼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삶이 회복이 되고 우리의 장막이 회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이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회복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확실한 의지로 표현을 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회복이 되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열방 앞에서, 만인 앞에서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백성이기 때문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붙드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품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자녀를,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거룩한 성품과 신실한 약속의 바탕 위에 놓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까이서, 만나고, 뵙고, 교훈을 받고, 신앙하도록 하셨습니다. 영적인 충만한 은혜와 물질의 부요함, 육신의 강건함을 주님을 통해서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 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나 오늘 사도행전이나 무너진 천막, 무너진 장막을 먼저 말씀을 합니다. 회복을 말씀하시면서 천막과 장막을 먼저 말씀합니다. 여러분, 씨 뿌리는 것을 먼저가 아닙니다. 수고와 땀을 먼저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정과 열심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천막, 무너진 장막을 먼저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1-2. 그러면 왜 가장 먼저 다윗의 무너진 천막, 무너진 장막이 먼저입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아모스서9;11절에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여러분, 천막이나 장막은 삶의 터전입니다. 울타리입니다. 보호막입니다. 보호를 받아야하고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고 퇴락하고 틈이 생기고 허물어졌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보호막이 있어야 다른 여타의 것이 존재합니다. 울타리가 있어야 우리의 육체와 삶이 보호를 받습니다. 보호막이 있어야 외부로부터 그 어떤 요소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삶에나 육체나 물질에 침투를 못합니다. 악한 사탄 마귀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천막, 장막, 울타리, 보호막이 우선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우선입니다. 여러분, 3.11 대지진과 쯔나미가 휩쓸고 간 세월이 벌써 5년입니다. 지금 어떻습니까요? 울타리가 있나요? 보호막ㅇ 있나요? 천막, 장막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당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그렇지 않습니까? 안전한 울타리가 있나요? 틈이 없이 단단한 삶으로 보호가 됩니까? 퇴락하지는 않으셨나요? 허물어지지는 않았나요?
아모스의 말씀처럼,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처럼 먼저 여러분의 삶의 장막과 천막의 보호막과 울타리와 안전함이 무엇보다도 우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무너진 장막, 무너진 천막을 먼저 말씀합니다. 이 것이 무너지고 퇴락이 되고 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지가 않고, 기대하는 대로 만들어지지가 않습니다. 원하고 바라는데로 결과가 산출이 되는데 그 결과가 한 순간에 없어집니다. 우리의 역량, 우리의 달란트는 보호막, 장막, 천막이 있어야 꽃을 피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무너진 장막, 무너진 천막이, 보호막과 울타리가 사순절을 통하여 빠른 시간 안에 먼저 다시 세워지시기를, 그래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역량이 제대로 사용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그러면 왜 다윗의 천막입니까? 여러분, 솔로몬 성전이 아닙니다. 헤롯의 궁전이 아닙니다. 모세의 회막도 아닙니다. 다윗의 천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성소를 처음 준비시키셨는데 그것이 성막입니다. 성소라고도 하고 회막 이라고 하는 장막입니다. 나중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친히 거하시는 장소로서, 거룩한 곳입니다. 가장 최초에 아주 섬세하게 지시하셔서 만들게 하신 모세의 성막입니다. 그리고 다윗시대를 지나면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솔로몬의 성전이 있습니다, 물론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이 다 설계도하고 성전에 들어갈 모든 자재와 인력도 다윗이 다 준비를 해 놓은 것입니다. 다만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어 일으키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다윗의 장막은 그야말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천막입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다른 장막들은 그래도 최소한의 성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인의 뜰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성막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은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뜰도 없고, 성소도 없습니다. 지성소 안에 두는 법궤만을 모시고 천으로 한 바퀴 휘 두른, 말 그대로 천막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른 장막이 아니라 다윗의 그 천막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 허름한 다윗의 집에 향수를 느끼셨을까요?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그 무엇인가를 사로잡은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하시고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하고도 엄청난 자산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열정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끝없이 갈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임하시고 계심을 계속 따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중요한 한 테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외형이나 의식이 아니라 영적인 갈망입니다. 내적인 갈망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갈망을 가진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역사 이래, 그 일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애쓰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까지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 집이라고 다 같은 집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갈망과 열정과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겉모습은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천막이라도 거기 거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열망이 다윗의 장막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퇴락한 집에 깊은 향수를 느끼시면서 다시 그 집을 일으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궁정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열정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 봉헌 앞에서 왕상9;6-8에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 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 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열정이 없으면 던져버리고,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 온 제자들이 헤롯 성전의 그 웅장한 모습을 보고 놀라자 눅21;6에서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런데 주님의 말씀대로 솔로몬 성전이나 헤롯 성전은 지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다 무너져 지상에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열망을 원하십니다. 퇴락한 성전일지라도 무너진 성막일지라도 지금도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너진 것 때문에 힘이 드시지요? 삶이 퇴락한 상황 때문에 열정이 식어지지요? 육신의 틈이 생긴 것 때문에 세상의 어두움이 왕래하지요? 그래서 우왕좌왕하지요? 그러나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열정이 퇴락하고 무너지고 틈이 생긴 것을 막고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열정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순절 이 기간에 열정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울타리, 보호막, 장막을 다시 세우시고 수축할 수 있는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다윗의 천막에 비밀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천막으로 된 집이지만 그 집은 겉보기와는 달리 보통 집이 아닙니다. 다윗의 천막은 기럇여아림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와서 완성이 됩니다. 오는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열정이 있을 때 그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금으로 도금된 그 상자에 있었을까요? 그의 관심은 언약궤 사이에 있었던 두 그룹의 펼친 날개 사이에 있었던 불꽃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냅니다.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교제, 그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망으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원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정예부대 삼만을 동원해서 호위했지만, 그 첫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법궤를 실은 소가 뛰고 그 궤를 잡았던 웃사가 그만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을 요약하면 법궤는 반드시 사람이 어깨에 메도록 규정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법궤의 운반을 소가 끄는 수레가 하도록 방치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궤는 길이가 114cm 에 가로 세로가 68.4cm입니다. 궤 뚜껑은 금으로 만들어졌고, 뚜껑 위에는 정금으로 만들어진 두 그룹이 있습니다. 궤의 네 귀퉁이에 금고리를 달고 고리에 도금한 채를 연결해서 운반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물질중의 하나입니다. 궤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여러 부분이 금으로 되어 있는 그 상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래서 16km 나 되는 여정을 소가 끄는 수레로 옮기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수레에 실어서 소들이 끌고 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광이라는, 부흥이라는 험난한 여정에서 고생은 다른 사람이 하고, 다른 것에 짐 지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행렬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추기만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제 그만 해라! 너희가 생각 없이, 예의 없이 대하는 일을 그만 해라. 아무 수고도 없이 나를 어느 지점까지 데려가기를 원하느냐! 나의 영광을 너희의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프로그램과 방법들과 의식들에 담으려고 하지 마라. 너희 수레를 취하든지 나의 궤를 취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적인 판단과 사고방식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궤를 흔드셨습니다. 웃사는 궤를 그냥 내버려 두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흔드신 것을 사람이 붙잡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두 번째로 그 궤를 운반하기로 했을 때는 하나님의 지침을 주의 깊게 따랐습니다. 레위 인을 시켜서 그 궤를 옮기고 레위 인이 여섯 걸음을 뗄 때마다 소 한 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섯 걸음 당 제사 한 번!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레위 인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레위 인들은 16km나 되는 거리를 가는 동안, 그 무거운 언약궤를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섯 걸음마다 그 번거롭고 힘든, 소 한 마리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행렬 전체가 얼마나 행로가 지체가 되고 몸이 지쳤겠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수고의 땀을 흘려야 됩니다. 땀은 하나님께나 이 땅에서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땀은 가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땀을 흘리는 예배를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예배는 땀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운반하면서도 땀을 흘리지 않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는 옆에서 따라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까지 여러분은 어떤 수고의 땀을 흘리셨습니까? 기도의 땀입니까? 연습의 땀입니까? 물질의 땀입니까? 마침내 다윗이 레위인들과 예배자들과 함께 그 먼 길을 도보로 이동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 감격과 기쁨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그렇게 아이처럼 춤추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 미갈은 다윗을 책망했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하지요. “이 모두가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다. 주가 나를 나 되게 하셨는데 춤추며 기뻐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어놀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 그로부터 미갈은 다시는 다윗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불임여성으로 살아갑니다. 그 미갈 같이 영적으로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자신, 우리 교회는 아닌지요? 마침내 녹초가 된 레위 인들이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천막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식과 지혜와 그리고 수고와 땀과 지체됨과 찬양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다윗의 장막입니다. 천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 어떠한 수고와 땀이 있어야 하는지? 왜 지체가 되어도 괜찮은지? 아시고 다윗의 장막을 세우시는 신앙생활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무너진 다윗의 장막과 천막이 다시 세워지는 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십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이 그 임재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 민족에게 먹히고 세상의 어두움이 엄습할 줄로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유기되고 이방인으로 알았습니다. 영원 밖에 있었습니다. 영원한 죽음만이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우리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보호막을 형성했습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마귀 사탄이 들어올 틈을 주님의 보혈로 막았습니다. 동록이 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죄악이 들어 올 수 있는 그 부분을 막으셨습니다. 육체의 고통도 해방을 시켰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이 무너진 장막이고 무너진 천막이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다시 세워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 동서남북의 풍성한 복이 임하게 됩니다. 반드시 복주고 복주며 반드시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 임마누엘 주님이 친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무엇을 통해서 무너진 것이 회복이 될까요? 우리의 무엇을 통해서 번성케 될까요?
2-1. 주님에 대한 열망을 통해서 다시 세워집니다. 오늘날 교회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답은 지금 문이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계3;20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 주님은 문 앞에 서서 다윗처럼 성령의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부드러운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 사람과 교회를 찾으십니다. 그런가하면 직접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아5;2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지금 주님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한데 연인인 우리는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집이 잠겨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열쇠를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열쇠를 주셨습니다. 열으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저와 여러분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마16;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는 바로 우리에게 쥐어져 있습니다. 삶이 부요해지는 것 우리 신앙인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문을 닫을 권세를 받았습니다. 분명히 열쇠는 우리 손에 있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주 놀라운 현실을 분명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천국 문이 사람들의 전통으로 굳게 닫혀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편견으로 닫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솔로몬의 신부와 똑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을 할 줄을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하면서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엇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하나님과 약혼한 연인이요, 신부인 우리가 너무나 안일해져 있습니다. 손을 넣고 있습니다. 귀찮기 때문에 문 열기를 거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대가가 너무 커 보이고,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니까 주님이 내 마음 문을 두드려도 마음은 냉랭하고 걸음은 느려져서 마지못해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타깝게도 노크 소리는 멈춥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솔로몬의 게으른 신부처럼 일어나 문을 열지만 남은 것은 그 분이 서 계셨던 자리에서 피어나는 향기뿐입니다. 아5;6“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영적 상황입니다. 느긋해져 있습니다.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누웠으니, 손을 씻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불임을 겪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가지불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장막에는 사람과 하나님을 나누는 휘장이 없습니다. 레위인들이 휘장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주는 그 일을 우리의 몸으로써 해야 하고, 그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도록 그 장막을 지켜야 합니다. 외롭고 힘든 영혼들의 마음을 만져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시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하나님이 다시 세우고 싶은 다윗의 집이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주님의 임재를 통해서 무너진 장막과 천막이 다시 세워집니다. 다시 세움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갈망과 그 분의 임재를 유일한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임재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얼굴 보는 것을 기뻐하고, 예배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임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왜 찾을까요? 무너진 장막 무너진 천막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다짐을 하면 훨씬 더 힘들어집니다. 마치 일이 다 끝난 줄 알았던 레위 인에게 또 다시 임무가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복 주시는 그 분을 더 갈망하고, 부흥보다 부흥을 주시는 그 분의 임재를 더 기다립시다! 내 마음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임재하심을 갈망하십시다!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주님의 손보다 주님의 얼굴을 더 갈망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주님의 임재를 갈망할 때 거기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다시 세움을 입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꼭 잊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꼭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물을 하다 보니 언젠가는 사람들에게서 섭섭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양미화 집사님께서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맛난 떡을 40개나 포장을 해서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런 양집사님을 보면서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런데 떡에, 선물에 먼저 눈이 가면 어떨까요? 그래요. 알맹이가 중요합니다. 교회도 역시 알맹이가 있어야 하고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임재입니다. 지금 이 예배하는 자리에 주님의 임재를 확실히 느껴야 합니다. 누가든지 똑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임재하심 때문에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얼마나 주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드림으로써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과 복과 승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와 각 공동체 위에 지금부터 바로 있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그러면 장막과 천막을 다시 세우시고, 회복시킨 이후에는 무엇을 회복시킵니까? 삶의 터전들을 회복시킵니다. 소산과 소출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합니까? 추수할 것이 너무 많아 추수가 다 끝나기도 전에 다시 파종을 하고. 곡식을 베는 사람의 뒤를 이어 밭을 가는 사람으로 연결이 됩니다. 포도원의 소출로 삶을 기름지게 하시고 소산으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만국으로 기업을 얻게 하시고 사로잡히고 메인 것을 푸십니다. 그 땅에 심으셔서 다시는 뽑히지 않고 영원히 섬기며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회복된 다윗 왕국의 영적인 축복이 절정을 이루고 그 나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을 보여 줍니다. 환난과 역경에서 돌이킴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회복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보다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강조점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다윗의 언약을 누가 이루십니까?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이 회복의 약속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러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었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하여 주시고 부활하셔서 진정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주님 안에서 이 사실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이 생기게 되고, 이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 마음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어두워진 우리 내면을 치료하여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시켜 주고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사순절 기간에 주님으로 다시 세워지는 장막과 함께 소출과 소산이 그리고 영원히 뿌리 내림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상열 목사(일본 히메지비젼교회 담임)
월드미션뉴스 김한나 기자 churchus24@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