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2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는 창세기 1:26-28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스림의 회복, 주기도문은 이를 위해 첫 부분은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이고 두 번째 부분은 ‘우리로 다스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이다. 그럼 무엇을 다스리며 살아야 바로 된 삶의 회복이 이루어지는가?
1.물질을 바로 다스리며,
2.인간관계를 바로 다스리고,
3.악을 바로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물질이 바로 다스려질 때,
창조 때 주어진 인간의 본래 모습이 회복된다.
양식의 문제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은 육신에 필요한 먹고 마시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적인 양식을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영적인 부분은 주기도문의 첫 번째 부분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을 요구할 때 이미 다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하심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할 때 영적인 부분은 회복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과 연관 고리를 가지고 있다. 가정을 책임지는 문제 뿐 아니라 얼마를 소유하고 이루었냐는 문제는 내가 남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며 사느냐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갑과 을의 문제가 얽혀져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문화가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 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 눈을 뜨면 맞이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해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일용한 양식
입술로의 고백과 마음이 원하는 고백에는 괴리가 있다. 입술로는 일용한 양식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풍족한 넘치는 양식을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 라는 기도는 ‘나에게만 나의 가족에게만 풍족한 양식으로 채워주시옵고’로 변질되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닌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도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는 일용한 양식이다.
경쟁하는 삶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양적인 풍성함으로 복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문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너의 관계이다. 얼마나 더 가졌느냐 얼마나 더 이루었느냐를 가지고 상대방과 비교하며 사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일용한 양식이란 잠언 30:8에서는 필요한 양식으로 정의하고, 모든 것에 처할 줄 아는 자족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빌립보서 4:11-12에서 말씀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오늘 우리에게
주기도문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우리”이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나”로 바꾸어 기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신앙의 걸림돌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커다란 오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주기도문은 ‘나에게만’ 아닌 ‘우리를 돌아보라’고 말씀한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한다.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일용한 양식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남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삶을 명령하고 있다. 에베소서 4:28에서는 우리가 수고하는 목적을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에베소서 4:28)
성경은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남을 돌아보고 내가 가진 재능과 부와 재주를 남을 돕는데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베푸는 삶이 기독교인들의 살아가는 삶의 의무임을 분명히 한다. 주기도문에서는 나의 일용한 양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용한 양식이다. 사업주의 배를 불리는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함께 필요한 양식을 나누어 갖는 기업이 기독교 기업가에게 주어진 의무다.
부자가 더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의 이익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성경적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경은 도와 할 대상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를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고아와 과부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를 잃어버린 자들이며 나그네 된 자는 법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이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명기 10:18)라고 하시며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명기 27:19)고 명하신다.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물질의 종이 되지 않고 물질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일용한 양식의 기도에 있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삶이란 나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오늘 주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내 것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삶의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에 들어있다.
예승장로교회(김성철 목사)
김한나 기자 churchus2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