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장(5)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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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32-39) 광야(Desert, Wilderness-KJV)란 인적이 없고 개척되지 않은 넓은 들판으로, 개역성경의 ‘광야’는 히브리어 ‘미드바르’(midbar), ‘에쉬몬’(yeshimon), ‘아라바’(‘arabah), 헬라어 ‘에레모스’(eremos), ‘에레미야’(eremia) 등의 단어를 번역한 말이다. 성경에서 광야는 시험과 고난의 장소였던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이 나타났던 장소였다(출 3:12).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동쪽과 남쪽 경계 너머에 있는 광야들이 브엘세바(창 21:14), 에담(민 33:8), 다메섹(왕상 19:15), 에돔(왕하 3:8), 엔게디(삼상 24:1), 기브온(삼하 2:24), 모압(민 21:11), 바란(민 10:12), 수르(출 15:22), 시내(출 19:2), 신(출 16:1) 등과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40여 년을 지냈던(민 14:33) 곳으로, 마실 물이나 음식은 없었고(민 21:5) 위험한 짐승들이 있던 곳이었다(신 8:15; 32:10).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량하며 메마른 이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던(출 14:11-12; 16:2-3) 한편,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시편 기자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시 78:40; 95:8; 106:9)과 이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시 68:7; 136:16)을 소재로 노래했다. 선지자들은 황폐화된 땅을 광야로 표현하기도 했다(사 63:13; 렘 22:6; 호 2:3). 때로 척박한 광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아름다운 땅으로 변할 장소로 언급되었다(사 32:16; 35:1; 51:3). 축사(祝謝, Blessing and giving thanks)란 축복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다윗의 통치 말기에 조직된 성가대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께 올렸던 ‘감사의 말’(대상 23:30,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표준 새 번역)을 개역성경은 “여호와께 축사하며”라고 했다. 또한 식사 자리에서 축사, 즉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례였다. 그들은 식사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예수님께서도 식사 자리에서 자주 식사 기도(마 14:19; 15:36; 26:26,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표준새번역)를 드리셨다. 이러한 당시의 식사 기도의 관습은 오늘날 식사 기도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마가단(Magadan)은 지명으로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예수님께서는 4,000 명을 먹이신 후 이곳을 방문했다(마 15:39). 이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8:10에는 ‘달마누다’(Dalmanutha)로 되어 있다. 이 지명은 마태복음 15:39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70인역에서 헬라어 ‘마가단’(magadan)은 ‘탑’, ‘망대’라는 뜻의 히브리어 ‘믹달’(migdal)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로 인해 ‘막달라’(‘탑’과 ‘망대’를 뜻하는 아람어) 지역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를 따라 KJV은 이 지명을 ‘magdala’로 표기했다. 여기서 무리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낮 사흘이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병도 고침 받고, 말씀도 듣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에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지고 다니던 양식도 떨어지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게 되고 예수님의 눈에는 이들에게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굶주린 무리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으셨다. 사랑을 베풀고 그동안 베풀었던 사랑으로 인해서 배신의 아픔을 껶는다 할찌라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셨다.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무리를 앉게 하시고 일곱 개 떡과 그 생선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누어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4천명이더라고 했다. 굶주린 군중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은 그것이 군중에 비해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제자들의 것을 먼저 가져 오기를 바라셨다. 5병2어의 기적의 사건이 있을 때도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때도 있었다(마 14:16). 예수님의 기적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거나 예수가 처음부터 기적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최소한 자기에게 따르는 제자들에게서부터 헌신이 되어 지기를 기대했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가져오기를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종종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자기 것은 움켜쥐고 남의 손에 있는 것만 바라는 사람들, 그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위 스폰서만 찾으려는 사람들, 이런 사람의 마음은 탐욕이나 자기 배만 채우려는 얌체적인 사람이 아닐까? 이러한 사람은 평생 사역해도 멋진 기적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이 가져온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사 무리에게 나누어 주라’하신 이 말씀은 ‘기적은 떡을 찢어야 나누어 먹는 것이고 그래서 떡을 찢을 때 그 고통이 크고 아프기 때문에 사람들은 떡을 예수님의 손에 맡겼다가 도로 찾아가는 사람이 더러 있다’(워치만니)는 것이다. 군중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제자들의 떡이 찢어져야 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무리를 먹이신 후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올라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