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6)
부활의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 신앙의 초심을 회복하자!
부활은 회복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이 되었으며, 사탄이 지배한 세상에 주님의 뜻이 이뤄져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이 달려졌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새로운 활력소를 얻고 제2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사흘이 되던 날(눅 24:22)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25리(60스타디온=11.2km)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Emmaus ‘작은 온천’이란 뜻)는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가는 방향에 있는데 탈무드에서는 엠마옴으로 나옵니다. 지금은 ‘엠마오 마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예루살렘과 텔아비브간 고속도로에서 서쪽으로 달리다가 엠마오 출구에서 나와 조금만 가면 엠마오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기념교회 터가 나옵니다. 구약시대 아얄론 계곡 (여호수아. 10:12)인데,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끄는 로마와 비잔틴 유물들을 발굴한 이 장소는, BC 165년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를 상대로 크게 승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온천이 있었나 봅니다. 엠마오에 캐톨릭 수녀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이야기하셨습니다(눅24:13) 두 사람은 한 가닥의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이, 낙심과 실망에 빠져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슬픈 기색을 띠고 지난 주말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제 나름대로 지난날들의 추억들을 하나씩 회상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예수님과 같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안해서 일찌감치 피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그들이 목격한 많은 사건들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좋은 말씀 듣고, 병자가 치유되고,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5병2어의 기적을 비롯해서,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끈질긴 질문에도 무난히 척척 대답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의 그 우쭐하던 마음과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열흘 전에는 호산나를 부르는 환호성속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는, 금방이라도 로마제국의 구속에서 해방을 시켜, 유대나라의 왕이 되며, 제자들은 한자리씩 높은 지위를 얻겠노라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아침에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 되고 말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방치해 두었던 고깃배와 그물을 수리해서 고기를 잡아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속히 직장을 찾아서 3년간 방치한 가족들도 먹여 살려야만 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사람들은 절망, 불안, 허탈감, 슬픔 속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장사 지낸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말로만 듣던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이신 것을 못 알아본 것은 모습이 변모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성경을 풀어 메시야 사건을 해석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 . .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근심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안이 변하여 평안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변하여 행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기만 해도 이렇게 행복해 집니다. 오늘 이 시간 이런 만남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우리 인생의 실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소망이 없을 때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첫째로,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눅 24:18에 의하면 글로바(Cleophas)와 다른 제자라고 되어 있는데, 많은 성경주경학자들이 그의 아내 마리아로 이해합니다. 요 19:25에 보면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부부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후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 고향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여행은 낭만과 꿈이 있는 즐거운 관광여행이 아닙니다. 기다려주는 이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된 장소로 찾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습니다(눅13:33).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서 계시지 않는 곳으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세상을 향하여 떠나간 것입니다. 성경에는 고국(예루살렘)을 떠났다가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① 룻기에 나오는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다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나라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가서 아들 둘을 결혼까지 시켜 잘살아 보려고 했지만 남편도 죽고 아들 둘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에 축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② 왕상2:36절 이하의 말씀에는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이는 다윗왕이 난리를 피하여 피난을 갈 때에 다윗을 욕하고 저주하였으나 나중에 다윗이 환궁을 할 때 용서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후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에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 예루살렘성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였고 시므이도 그렇게 하기로 하였으나 몇 년이 지났을 때에 시므이의 종 두 명이 도망을 갔습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왕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종을 찾으려 예루살렘성을 벗어났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③ 눅10:36절 이하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강도를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④ 창12:10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시험과 환란을 당하였습니다.
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승천을 지켜본 500문도 중, 이 말씀대로 120문도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전혀 기도에 힘쓰니 성령을 받았으나. 돌아간 380명은 이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고국을 떠났다가 환란을 당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눅2:36절에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다가 결례받으러 오신 아기 예수님(메시야)를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두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염려하며 대화 나누며 갔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걱정과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믿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두고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저들과 동행하고 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은 영적으로 잠을 잤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25리라고 하지만 아마 이들은 지금 25리가 아니라 250리처럼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일들과 신변의 위협 등으로 걱정과 근심에 쌓여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머리속에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인자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영광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잊어버린 듯 영광을 얻으신 주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말함이라" (사59:1) 또한 저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가면서도 주님께서 자기들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보며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의 입술은 찬송을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손발은 지금 남을 도와주며 남을 섬기는 봉사를 하며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떠났고,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주님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2) 성경속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묵상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말씀 충만, 은혜 충만, 성령 충만, 진리 충만입니다. 마음이 뜨거워 질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는 것은 비단 우리가 성령의 불을 받아서 우리의 육체가 뜨거워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의 시대를 보면 너무나 냉정하고 너무나 차가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현대인들은 차거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인간 본연의 아름답고 따뜻함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11:16) 라고 주님께서 한탄 하였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얼어붙은 마음이 녹을 줄을 모릅니다. 뜨거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뜨거운 사랑과, 뜨거운 열심과, 뜨거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감리교를 창설하신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님은 런던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위치한 작은 교회 수요 집회에서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는 호렙산에서 숨어 지낼 때 사역을 포기하고 죽고 싶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000명을 남겨 주셨음을 알리시고 세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용기를 얻고 다시 초심이 회복되어 사명을 계속 감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역 중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사역을 접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절망에 빠져서 길을 가고 있던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들려주실 때에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고 하였습니다. 열심(熱心)이란 뜨거운 마음을 말합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으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또 마음이 뜨겁지 않으면 범죄를 하여도 가책이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 나오지 않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않아도 마음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음은 영혼에 병이 든 것입니다.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고 힘이 듭니다. 자동차도 기름에 불이 붙어서 점화되어야 시동이 걸립니다. 엔진이 뜨거워져야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 질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남 같이 고달픈 인생길을 가는 여러분들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고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엠마오 식탁에서 주님께서 축사하신 떡을 받고서야 눈이 밝아졌습니다.
주님께서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가려던 길을 계속 가고자 할 때 두 제자들은 강권하여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식사를 제공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지나가는 손님을 대접하던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면 흔히 주인이 축사를 하고 나그네에게 떼어주며 음식을 제공했는데, 노상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던 글로바는 이 식사기도를 손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주님께서 축사를 하실 때에야 그들이 눈이 열려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축복 기도를 하시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열립니다.
갈멜산지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하여 승리한 엘리야가 이튿날 이세벨의 살해 위협 소식에 낙담하여 왕상 19:3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브엘세바 광야의 로뎀나무아래 누워서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물을 주어 기운을 회복케 하시고 눈이 밝아져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를 먹고서 죄악의 눈, 육체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 축사하신 떡을 먹고 우리 눈의 비늘 같은 것이 사라지고 영안이 열리며, 신령한 눈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과 환란으로, 재리와 염려로, 가리워진 영의 눈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만나를 먹고 밝아지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령한 눈이 밝아지며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보고도 진리로 믿지 못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께서 축사하실 때 저들의 눈이 밝아진 두 사람은 엠마오에 그대로 머물 수 없어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동료 제자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김두완 장로님의 작곡, 작사곡인 “엠마오 마을로” 복음송가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주셨네
2. 이 세상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결실입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옴 같이,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옴 같이, 이 두 사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은 능동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방향으로 가던 길을 돌이키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도적질 하던 도둑이 도둑질을 끊고 죄 짖던 사람이 죄를 짖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낙심 중에 세상을 향하여 가던 발걸음이 예수를 만나 담대함을 얻어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뜨거워 질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핍박을 피하여 도망가는데 주님께서 로마로 가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러 가십니까?) 이때 주님의 대답은 “네가 피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노라”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주님 앞서 가서 다시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주님처럼 바로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 죄송스러워서 그랬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낙심된 자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여 주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이 자리에도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벧엘에서 지친 몸으로 홀로 잠들어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고, 새벽 미명에 성전에서 고히 잠들어 있는 어린 사무엘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호렙산에서 양을 치던 팔십세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속에서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한 밤중에 풍랑으로 고통을 당할 때에도 주님은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동행해 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이제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멈추고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갈 예루살렘은 처음사랑 처음 주님을 만난 순간, 첫믿음으로 뜨거웠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합시다. 초심을 회복합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6:1)
찬송 135장(통 133장)은 일본 홀리네스교단에서 최초로 만든《리바이벌 창가》(1909)에서 이장하(李章夏, c.1886~ ?) 목사가 번역하여, 성결교단의 《신증 복음가, 1919》 87장에 실려 오늘까지 사랑을 받는 찬송입니다.
1. 어저께나 오늘이나 어느 때든지 영원토록 변함없는 거룩한 말씀
믿고 순종하는 이의 생명되시며 한량없이 아름답고 기쁜 말일세
(후렴)
어제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주 예수께 찬양합니다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니다
2. 풍랑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고 갈릴리의 험한 풍파 잔잔케 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위하여 눈물짓고 기도하신 고난의 주님
3.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셨네
4. 엠마오로 행하시던 주님 오늘도 한결같이 우리곁에 함께 계시고
우리들을 영접하러 다시 오실 때 변함없는 영광의 주 친히 뵈오리
윤사무엘 목사 (Samuel Yun 尹三悅)
연세대 신과대 졸 (신학사),연세대 대학원 신학과 졸 (신학석사, 구약학 전공)
총신 (예장 합동) 졸 M.Div (Equiv)]
University of Dubuque Thological Seminary 졸 (M.A.R. 종교학)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in Chicago 졸 (M. Div.)
Harvard University Divinity School 졸 (Th.M. 고대근동학전공)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Th.D. 과정이수, 구약학)
Cohen University & Theological Seminary (Th.D., 구약학)
Latin University (Ph.D. in Religion 종교학)
Faith Theological Seminary & Christian College 졸 (Ph.D. in Theology 구약학박사)
Universidad Cristiana del Bolivia (UCEBOL)
Honorary Doctor of Education (명예교육학 박사)
현 감람산장로교회(담임목사),감람원 세계선교회 및 성경연구소 대표
현 NYSKC (예배회복운동) 학회 (Learned Society) 학회장
김한나 기자 churchus2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