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30
하나님나라 백성, 삶의 기준
[마태복음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인 기독교인들은 절대적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절대적인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결론으로 삶의 기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7장은 기독교인이 무엇을 기준삼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선언하고 있다. 내 잣대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잣대로(원하는대로) 살아가야 하는가? 원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원하는대로 기도하는 기도의 황금률을 말씀하고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분명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다. 요지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천국(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많은 사람이 오해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행함으로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고 잘못된 주장을 한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상설교 전체에서 예수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신 것과 연관해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등장하는 것은 주기도문이다(마태복음 6장).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에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곧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결론은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하나님의 뜻이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산상설교 전체로 확장시켜보자. 마태복음 6장에서는 하나님나라 백성(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관계라고 선포된다.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주여 부르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보인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내가 또는 인간이 드러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삶의 원리가 주어진다. 하나님이 말씀(율법)을 주셨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주셨는가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이다. 곁으로 드러나 있는 법의 조문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왜 주어졌어야 하는지 그 내면에 들어있는 사랑의 원리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사랑의 원리는 세상이 기독교인들에게 악의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더라도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의 원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용서의 주고받기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뻐하셨다. 이렇게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사랑의 원리와 이러한 사랑으로 원수에게까지 다가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영광)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의 원리와 하나님나라 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한다는 것은 쉬어보이지 않는다. 단순이 주여 주여 부르고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왜냐면 기독교는 너와 나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태복음 5:12에서 어렵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신다. 이 구절에서 이 땅에서 어떠한 부나 명예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하늘에서의 상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한다.
행위에 앞서서 믿음의 문제다. 야고보서는 참으로 믿는다면 행함이 따른 것이라고 말씀한다. 야고보서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행함 이전에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행함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만드는 그 믿음이 우리로 천국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석 위에 집을 세우라
반석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모래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반석에 대하여는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하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땅에 깊이 박혀있는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베드로가 고백했던 그 신앙고백의 믿음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내 나름의 잣대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잣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원대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원대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하나님 없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묻는다. 땅에 깊이 박혀 움직이지 않는 반석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사는 삶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평온할 때는 무엇이 견고한지 알 수 없다. 반석 위에나 모래 위에서 바람도 없고 창수가 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집의 모습만을 가지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는다. 참 믿음의 사람과 거짓 믿음의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안다. 구별이 된다.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어려운 때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거짓 믿음을 가진 자는 바람에 부는대로 흔들린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흔들린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아예 뿌리채 믿음을 날라가 버린다.
하나님나라의 백성 기독교인은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신의 믿음을 세운다. 하나님 말씀이 자신이 삶의 원칙이요 기준으로 안다.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창수가 일어나도 말씀의 반석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붕을 날아가도 창문이 깨져도 반석위에 세워진 뼈대는 남아 있다. 기둥을 남아있다. 집의 형태는 여전히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자들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는 예수님의 경고의 소리를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삶의 기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둔다.
예승장로교회/김성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