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 9
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 읽기 9
예수님의 탄생
[기독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천주교]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영 어]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라틴어]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구주의 조건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구주를 약속하셨다.
(1)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창세기 3:15은 구주에 대한 첫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은 구주는 사람으로 태어날 것임을 약속한 첫 구절이다. 갈라디아서 4:4에서는 구주가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고 있다. 구주가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사람이 그 죄의 값을 받아야 한다. 이는 창세기 9:5-6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2)구주는 죄가 없어야 한다. 죄인이 죄인의 죄 값을 치룰 수는 없다. 구주로 태어날 자는 사람이되 사람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원죄조차도 없어야 한다.
(3)구주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이다. 한 인간이 감당할만한 인간은 몇이나 될까? 전 인류를 감당할 자는 하나님밖에는 없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경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한 처녀였다. 누가복음은 이를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의사였다.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했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의사였던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잉태했다는 말은 아이가 자궁에 있다는 의미이다. 성령 하나님이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은 두 가지의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1)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아들로서의 하나님(성자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은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알려주고 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부른다. 예수란 이름의 뜻이 구원자다. (2)원죄가 없으시다는 논리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원죄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거절하고 인간이 보기에 좋은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인간이 가지는 원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는 방식대로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다.
처녀였던 마리아에게 나시다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구주는 사람으로 태어나시되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로부터 태어날 것이라고 이사야 7:14에서 약속되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완벽한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다른 점에 대하여 히브리서 4:15은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여기에서 죄는 자범죄 곧 스스로 지은 죄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8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시기에 인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할 수 있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원죄가 없으시고 사람의 모든 연약함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로서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완벽한 구주의 자격을 갖추셨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은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완벽한 분이심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에게 나셨다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항 고백은 예수님은 우리의 완벽한 구원자(구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섬기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기에 족보 이야기나 탄생 이야기가 없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있기에 달리 인간의 족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기에 다윗 왕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말씀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인간족보가 등장한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가 달라 보인다.
(1)마태복음 족보는 법률상 아버지 되는 요셉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다. 그런데 이 두 족보가 다윗에서 만난다.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 모두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했던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왕이란 백성을 대표하는 자로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다.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2)마태복음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민족에 대하여 복이 되라는 사명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받은 가장 근본적인 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신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누가복음 족보는 하나님으로까지 올라간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왔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망가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을 들여다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 10
동정녀 마리아
[기독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천주교]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영 어] I believe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라틴어]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첫째는 예수님을 “그의 외아들(his only Son)”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고백은 “그의 유일한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가 되어야 한다. (2)둘째는 “동정녀 마리아”이다. 한글 표현에는 ‘처녀였던 마리아’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라틴어나 영어를 보자. 정관사 ‘the’에다가 처녀라는 표기에는 고유명사에 붙이는 대문자로 표기한다. ‘Virgin’ 이러한 영어 표기에 따르면 마리가 예수님을 낳을 때 처녀였다는 고백을 넘어서 마리아에게만 특별하게 붙여진 그래서 다른 처녀와는 다른 처녀의 의미로 다가온다. 제대로 된 표기라면 ‘처녀였던 마리아 a virgin Maria’어야 했다. 이러한 사도신경의 고백은 사도신경은 천주교의 신앙고백이지 성경적인 신앙고백이 아님을 나타내 보이는 내용 중 하나가 된다.
천주교의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53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평생 동정(처녀)이신 마리아(sanctam gloriosam semper Virginem Mariam)”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결정했으며. 이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정을 라테란 공회(649)에서 이와 같이 내린다. “평생 동정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모친이며.......동정이 파손되지 않고 낳으셨으며 출산 이후에도 영원히 동정이시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파문을 받을지어다.” 이렇게 마리아가 오직 예수님만 낳았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독생자(only begotten Son)’을 ‘하나님의 유일한 한 아들(only one Son)’로 바꾸어 버리고, 단순히 한 처녀였던 마리아(a virgin)을 특별한 존재인 the Virgin 마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성경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다.
평생 동정녀 마리아라는 교리는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형제와 누이들에 대한 성경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태복음 13:55-56) 여기에 대해 천주교는 여기에 등장하는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사촌들이라고 설명한다. 억지로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라고 내세우고 있는 성구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내용이 들어있는 요한복음 19:25-27을 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성구가 결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처녀로 지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마리아가 처녀인 상태로 예수님을 낳은 후에 남편이 요셉과 관계를 맺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낳았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마리아가 평생 처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적어도 4명의 형제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그들이다. 이들 중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다. 이를 증명할 성구가 누가복음 2:7에 등장한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에 “첫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마리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영어성경은 이를 “her firstborn son”이라고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결국 마리아는 첫 번째 아들로 예수님을 낳은 후에 두 번째 세 번째 등등의 자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NIV 영어성경만 묘하게 번역하고 있다. “her firstborn, a son”인데, 굳이 마리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표기하면 되는데 한명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a son’이라고 강조하여 번역하고 있다. 정말이지 NIV 영어성경은 권하고 싶지 않은 영어성경이다.
이러한 증거로 더 확실한 성구가 마태복음 1:25이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를 KJV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And knew her not till she had brought forth her firstborn son: and he called his name JESUS.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을 낳기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가 낳으매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더라.” 이 구절에 따르면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지내지 않았음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낳기까지” 영어로는 ‘until’ 또는 ‘till’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정된 관계 곧 정혼 약혼한 관계였다. 그런데 마리아가 요셉 자신과 관계를 가진 적이 없음에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에는 처녀가 임신하였다면 돌에 맞아죽는 그야말로 즉결 처형에 처해져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요셉의 고민을 깊어지고 있었는데, 이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음과 태어날 아들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구주일 것임을 알려준다. 이에 요셉을 성령으로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까지(until) 관계를 맺지 아니하였다. 여기에서 ‘...까지 until’이라는 전치사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첫 번째 아들 her firstborn son” 이는 이미 밝힌 바이다. KJV 영어성경 외에 다른 영어성경은 ‘a son’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이유는 KJV이 신약성경의 원문이라고 보는 헬라어 성경과 기타 다른 성경이 원문으로 보는 헬라어 성경의 차이 때문이다. KJV 영어성경이 본 헬라어 성경이 사도로부터 이어져 온 성경으로 훨씬 믿을 만한 성경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2:7과 연관해서도 ‘a son 한 아들’이 아니라 ‘her firstborn son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훨씬 믿을만한 번역이다. 이렇게 성경이 기록함으로 마리아를 예수님을 낳을 때만 처녀인 상태로 낳았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첫 번째 아들이었으니 두 번째 세 번째 자녀도 있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임이 확실하다.
물론 마리아가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낳았으니 얼마나 복 받은 자인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다”(누가복음 1:42)고 말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마리아 역시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1:14에도 보면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 같이 기도에 힘쓰는 모습을 본다. 성경은 거기까지만 이야기 한다. 마리아가 모인 무리들 가운데 지도자처럼 행동했다는 기사 한 줄도 성경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마리아 역시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른 자들과 같이 기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도하는 120명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들 무리들 가운데 지도자로 보이는 자는 베드로였다. 마리아는 그러한 무리 중에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리아 역시 우리들과 같이 죄의 사함을 위해 십자가의 은혜를 믿었고 그렇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와 같이 구주가 필요한 인간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 한 인간이었다.
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 1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기독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천주교]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영 어]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라틴어]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예수님(성자 하나님)에 대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인격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다루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에서는 번역상의 문제가 보이며 그리고 해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문장으로 인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잘못된 번역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실제하는 인물이었다. 마태복음은 유다의 분봉 왕이었던 헤롯 왕에게 동방박사가 찾아온 이야기와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죽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에 있었던 인구조사를 위해 요셉이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간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음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사도신경 역시 예수님의 죽음이 언제 역사적으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보여준다.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에서 파견된 유다의 총독으로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라틴어에 보면 ‘sub’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아래에’라는 의미로 ‘subway(지하철)’ 등에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sub 본디오 빌라도’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가 맞다. 이를 영어번역에는 ‘unde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천주교는 ‘통치 아래서’라고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곧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를 ‘본디오 빌라도에게’라고 잘못되게 번역함으로 해석상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치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유다에 머물렀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라에 있었다. 유월절이나 어떤 절기 또는 특별한 일이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총독부 관저에 머물곤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던 때가 바로 유월절 기간이어서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려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협박에 굴복해서 비겁하게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한 것이다. 빌라도는 그의 비겁한 타협으로 인하여 비난을 받을 수는 있으나 빌라도가 예수님의 고난의 책임자인 것처럼 고백될 수는 없다.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로 잘못 번역해 놓으면 예수님의 죽으심의 책임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번역해 놓으면 사도신경 고백은 엉터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지금이라도 ‘본디오 빌라도아래에서’ 또는 ‘본디오 빌라도 통치 하에’로 바로 번역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나와 우리 모든 인간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 본디오 빌라도 때문에 그리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해석의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문구
한글 기독교 번역은 바르게 수정되어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라고 번역이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에 대하여는 사도신경에 기록이 없기에 여전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빌라도에게 있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선고하면서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태복음 27:24)고 하자 유대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백성에게 돌리라”(마태복음 27:25)고 답한다. 요한복음 19:12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니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는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은 유대인들의 소관이 아니었기에 결국 유대인들의 말에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그렇기에 사도신경이 오해 없이 고백하려면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에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으사”라고 기록해야 했다.
사도행전에서 행해진 설교를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었다고 선언한다.(사도행전 2:23,36, 3:14)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난을 주는 자들을 직접 말씀하셨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태복음 16:21)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빌라도에게 넘여준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한복음 19:11) 물론 이는 사도신경을 가르치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매 주일 때마다 고백되어지는 사도신경을 매 주일마다 설명해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사도신경 그 자체의 문구로 바로 이해되어지고 그 이해된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또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빌라도가 선고하도록 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단순히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본디오 빌라도에게’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이 오해를 줄일 뻔 했다. 이것보다 보다 근본적인 신앙고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야 했다. 그것은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어야 했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사도신경의 ‘신경’이란 말이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이다. 곧 내가 하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고백되어야 한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의 입술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 연관성은 바로 ‘나의 죄’이다. 단순히 나의 죄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것이 맞다. 사도신경은 이에 대하여 정확하게 고백한다. 그 ‘우리’안에 내가 있다.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고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고 선언한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베드로전서 3:18) 곧 우리들의 죄를 대신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 하셨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베드로전서 3:18)함이다. 우리들의 신앙고백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에”이다. 이로써 나의 신앙고백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사도신경은 이 고백이 빠졌다.
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 12
예수님의 죽음 1
[기독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천주교]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영 어]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라틴어]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성경은 인류의 역사가 세 번에 걸쳐서 바뀌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 변화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임함이다. 첫 번째 사건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한 사건이다. 인간의 타락이다.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은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창조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중심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인다. 세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인류 역사가 끝나는 순간이다. 영원히 사는 길과 영원히 죽는 길이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이 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던 이 세 가지 사건은 하나로 연결된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싶어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한 인간, 이것이 인간 타락의 모습이다. 사탄은 인간에게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인간은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고 부정하고 마침내 인류의 역사에서 지워버리고자 했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역사다. 타락이란 떨어진다는 의미와 함께 멀어진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서서히 하나님과 멀어져 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아닌 인간이 보기에 좋은 삶을 선택한 순간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걷어차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원죄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인간의 삶은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삶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성경은 마침내 인간에게 대하여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 3:11-12) 고 선언한다. 물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모습을 선언한 것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는 깨달아보고자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것이 성경이 기록된 이유다. 인류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들로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인간의 문제 : 죄
많은 자들이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깨달음의 시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있었다. 왜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결국은 죽음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깨달은 인간 최고의 깨달음은 인생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고(苦) 곧 고통이다.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가 고통임을 깨달았으니 이제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깨달음이 부족한 자들은 인간의 고통이 먹고사니즘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 인간의 고통이 해결되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다르게 보았다. 인간의 고통은 무엇인가에 집착함으로 곧 관계를 맺음으로 온다고 본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방안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관계를 끊으면 된다. 그리하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 마음의 평안함 고요함이 목적이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현세의 삶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비우는 마음의 수련을 한다. 고고한 표현을 빌리자면 도(道)를 닦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평안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시작이 잘못되면 결말도 잘못되게 나타난다.
성경은 인간의 수고로움이 곧 고통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물론 인간의 고통이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은 맞다. 문제는 너와 나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이다. 성경은 인간의 문제가 죄라고 본다. 관계를 끊어버림으로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잘못 얽힌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 행복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다. 너와 나의 관계가 힘들어진 것은 다름 아닌 죄가 끼어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잘못함으로 오는 고통은 문제이지만 너와 내가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 고통하며 수고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고통없는 행복은 없다. 평안함이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행복해지면 평안함이 따라온다.
인간은 여러 많은 관계를 맺고 산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관계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이 우선순위가 바뀌면 삶 자체가 꼬인다. 사람과의 관계보다 돈이 우선시 되면 그 꼬여버린 인생 문제 풀기는 불가능해진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좋은데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 얻어질 행복은 없다. 좋은 부자간의 관계를 유지한다해도 부부관계가 꼬이면 행복함은 고사하고 평안함을 누리기 힘들다. 이렇게 관계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성경은 이 우선순위에서 인간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씀한다. 이 관계가 무너졌기에 인간의 고통은 시작되었다고 선포한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 것은 이미 말한 바대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절하고 인간이 주인이 되어 살고자 함이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는 삶을 거절하고 내가 보기에 좋은 삶을 살고자 함이다.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한 자는 없게 된다. 인간이 보기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이다. 하나님나라의 청지기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나라의 왕인 하나님에게 반역을 한 것이다. 반역자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언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단순히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판단을 들어보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마태복음 5:25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인간은 그 어떠한 관계보다도 우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땅에서 주어진 관계의 불편함은 잠시이지만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한 지옥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 : 용서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용서밖에 없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내용이 있다. 단순히 물질의 문제면 배상함으로 끝나겠지만 마음의 상처 문제라면 더욱 복잡해진다. 너와 내가 서로의 잘못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방안은 용서 주고받기이다. 성경은 인간은 누구나 잘못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은 용서 주고받기가 문제 해결의 정답으로 선언한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도 용서 주고받기가 정답이다. 인간끼리는 서로가 상호 잘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으로 잘못하고 절대적으로 거룩한 관계라는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용서만이 해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함이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진 사건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인간이 믿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선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