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3)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고 | ||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고 마태 17: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 갈릴리 : Galilee > 팔레스타인 북쪽을 지칭한다. 히브리어의 ‘갈릴’(galil)이란 말에서 왔으며 ‘원’, ‘순회’,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BC 63년 로마인들이 행정구역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고정된 경계선이 없었다. 갈릴리는 앗수르인들이 북 왕국을 멸망시킨 때(BC 734-722)부터 마카비 기간(BC 80)까지는 유대인들에 의해 통치되지 못했다. ‘이방의 갈릴리’(사 9:1)라는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1세기의 갈릴리는 길이 약 70km, 넓이 40km2로 204개의 마을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갈릴리 : 숲이 우거진 언덕과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진 갈릴리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기적 사건들이 복음서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막 1:32-43; 3:10; 6:53-56). 비유들의 대다수 역시 이곳에서 말씀하셨다(마 13:3-8; 막 4:3-8; 눅 8:5-8 등).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 당시의 견해: 유대와 사마리아를 곁에 끼고 있는 갈릴리는 헬라 - 로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북쪽 지역은 다소 고립되어 있는 편이었고, 거주자들은 유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투리를 사용하거나(마 26:73) 그들의 관습이 유대의 풍습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경멸의 태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것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이는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요 1:46; 7:52; 마 2:23). 마 16:21절에 이어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이다. 거듭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심으로 제자들에게 이 사건을 깊이 생각하게 하도록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으셨을 것이다. 죽음의 사건은 부활이 전제된 사건이란 믿음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 결과에 대한 기대감도 가질 만하지만 제자들은 오히려 근심이 앞섰던 것이다. 이 말씀에는 지금에 와서 보면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뜻을 가지고 헌신했던 사람들이 가시적 현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볼 때면 낙심을 하고, 우리가 언제 헌신했던가? 하는 모습으로 예수(말씀)를 버리고 전통으로 내려온 유전적 믿음의 형식으로 되돌아 가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죽임을 당하고 3일에 살아나리라’하신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생각에 담아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죽음으로 근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