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1-4)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기서 ‘크다’는 원어(메이존 meivzwn)는 ‘더 크다’ 혹은 ‘가장 크다’는 뜻이다(BDAG, KJV, NASB, NIV).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교만, 세상적, 육신적 명예심이 보인다. 그때 예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듯이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교만과 명예심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과정이요 구원받는 자의 표가 되는 것이다.
* 천국(Heaven)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언급되었다(마 3:2; 5:3; 8:11; 13:11; 25:1 등). 일반적으로 천국, 즉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말로 보며, 다만 마태복음은 하나님이란 말을 함부로 쓰기를 주저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 :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은 메시아의 초림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재림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자는 서서히 성장하는 천국이며 후자는 돌연히 임재할 천국이고, 전자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이라면 후자는 초연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후자는 22, 25장의 천국 비유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전자가 현세의 교회라면 후자는 미래의 영원한 구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천국은 별개가 아니다. 현재의 천국 없이는 미래에 실현될 천국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는 외침은 회개하고 메시아이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들어가라는 것으로, 현재 교회에서 자라는 신령한 천국에의 초대이며,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천국에의 보증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천국에 들어갈 조건은 혈통이 아닌 회개하고 메시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말해 준다(마 3:8-9).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에서 사람들은 서열의 높은 자리에 관심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명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세계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도 서열다툼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원숭이의 세계도, 사자나 호랑이등 동물의 세계는 자리를 다투기 위해서 맹렬하게 싸운다고 한다. 힘이 약하거나 나이가 들어서 싸움에 자신이 없으면 뒤로 물러가거나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동물적 속성을 버리고 반대로 살자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님은 말로만 가르치고 교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본이 보이시면서 가르친 내용이다, 이 같은 교훈은 틈나실 때마다 하셨지만 세속적 가치에 젖어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의 교훈일뿐이고, 현실적 삶의 현장에서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삶의 모습이 아닌가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뭐 특별하게 살이유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그런 생각과 삶의 모습을 고쳐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맞추어 마음껏 욕심 따라 살아도 누가 간섭하거나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혹은 주님의 삶을 본받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살겠다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이 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본다. 이유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의식 적이었던 혹은 의식적으로도 많은 실수와 잘못된 행동을 통해서 주변에 실족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을 생각하니 감히 자판기 앞에 앉기가 양심이 찔리고 두려움이 나를 떨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런 마음을 회개하는 표현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서 생각과 마음을 바르게 고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사람들이 있을 것을 생각해서 이렇게 부끄러운 글이라도 기록으로 남겨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신에게 용기를 가지게 된 배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에 대해서는 기독교라는 종교테두리안에서 명예를 버리지 못하고 금전으로 몇 십억씩을 써가면서 높은 자리에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왜 자기를 낮추는 메시지를 교인들에게 전하면서 자기는 낮추는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증거하시기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그 중에 지도자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본 받아 갈수는 없을까? 교회지도자들은 사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2. 천국에서 큰 자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2-4)
여기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 가운데 ‘진실로’란 말을 자주 쓰셨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안 되는가? 예수님께서 ‘진실’이란 말을 쓰신 것은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이 아니니, 혹은 꼭 이렇게 될 것이니 이런 뜻을 담아하신 말씀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것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믿는 것인데 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들어올 수 없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 즉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라면 두 번째 관문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라고 행석해도 되는 말씀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했는데 감투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 정치하고 돈을 뿌리고 하는 모습들이 교회당 문화 안에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가? 교회 안에서 물리적 폴경이 동원되고 높은 자리를 두고 음모와 술수가 난무 했던 것은 어디서 유대된 것들인가? 그것은 로마교회가 되면서 교회의 세력화 권력화 우월주의 이런 것들이 소위 기독교계(Christendom=기독교세계, 명사로. the worldwide body or society of Christians. "He asserts that abortion was universally condemned by Christendom , a crime at common law, and a felony in the vast majority of states in the latter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사고(思考)를 만들었고,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 이분법사고라 할 수 있다. 이분법 사고란 ‘내게 속하면 선, 내게 속하지 않으면 악’이라고 규정을 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5)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8-9)은 이미 마태 5:29-30절에서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서 언급된 되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는 말씀을 중복으로 언급한 말씀이다. 만일 이 말씀대로라면 누구 한 사람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들이 행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어린 아이’하나의 실족에 대한 언급을 하시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란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어린아이’란 말은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이가 어린아이도, 가난한 사람도,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신앙이 어린 사람도 포괄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주께서는 후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0:26-27). 겸손은 교회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 .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다(빌 2:5-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큰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많이 섬기는 자이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자들의 모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