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4) 용서할 줄 모르는 종 | | |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마태 18:21-35
1.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21-22).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에 그것을 사과하고 회개할 때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사과와 회개를 전제(前提)한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부분에서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권면이나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고 그를 이방인, 즉 불신자로 여기라고 교훈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회개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실상 일곱 번이나 반복해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라기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상대가 진심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그를 언제든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말씀한 ‘형제의 죄’문제이다. 앞에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세 번 기회를 주라고 하셨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이교도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무제한적으로 용서하라 하신 것인가? 이렇게 상반된 말씀이 등장 될 때는 솔직히 고민이 된다. ‘어디서는 하지 말라’ ‘어디서는 해라’ 얼핏 보면 이렇게 상반 된 말씀들이 몇 차례 있다, 지금 여기의 얘기가 그런 것 중의 하나처럼 보인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죄의 성격에 있어서 구별이 된다. 죄에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6-17)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고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가? 본문 15-20절까지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교회(공동체)와 관계된 죄로 볼 수 있을 듯하고, 21-35절까지는 개인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로 불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하나님과 관계된 죄와 인간사회의 윤리나 도덕적인 사회적 범죄로 구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된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고,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한 것은 인간들끼리의 범죄를 가르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낸 것을 두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힙입어 한 것은 ‘성령 훼방’이란 점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되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접혀 온 여인의 죄를 두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한다’라고 하신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대게 이런 것을 거꾸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상대한 죄는 별로 상관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지만 사람 사이에서 범한 죄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 법석을 떠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가 재판장이 되는 행위를 할 때는 하나님의 주권침해란 점에서 도리어 용서받지 못한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창세기 9:18-27절에서 형제의 죄 문제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다.
그러면서 본문 21-35절의 동관의 비유는 후자 이야기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우리는 더 큰 죄를 용서 받은 사람들이 형제의 눈의 티 같은 실수는 용서하지 못한 자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 못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2. 회계(會計) 할 때에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3).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3. 달란트 비유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4-27)
달란트(Talent)란 저울로 무게를 다는 최대의 단위를 말한다. 달란트는 ‘한 덩어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키카르’(kikar)의 음역이며 헬라어 ‘탈란톤’(talanton)은 원래 ‘저울’, ‘계량된 것’의 뜻으로 무게를 재는 단위의 명칭이 되었다. 무게와 화폐의 단위를 나타내었던 달란트(talent)가 재능, 능력을 나타내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마 25:15-28 참고).
구약 시대에는 무게를 재는 최대의 단위로 많은 양의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데 사용되었다(출 25:39; 37:24; 38:24; 삼하 12:30; 왕상 10:10, 14; 대상 22:14; 스 7:22). 1달란트의 무게는 약 34kg으로 3,000세겔에 해당되었다. 달란트의 무게는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바벨론의 경우는 약 60kg이었고 가벼운 달란트의 무게는 30kg 되는 것도 있었다.
신약 시대로 오면서 헬라 계통의 달란트가 사용되었는데 무게를 재는 단위와 화폐의 단위로도 사용되었다(마 18:21-35; 25:15-28). 신약 시대 1달란트는 약 20.4kg정도 되었고 6,000데나리온(드라크마)에 해당되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실 때 6,000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과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대조하여 말씀하셨다(마 18:21-35).
탕감(蕩減, Canceling) 이란 빚 따위를 모두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느 10:31; 마 18:27, 32; 눅 7:42-43). 이 말은 형제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비유에서 언급되었다(마 18:27, 32; 눅 7:42-43).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주는 일(당시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었고 로마 제국이 유대 전국에서 징수한 세금액은 한 해에 800달란트였다)이 마땅한 일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시 78:38-39; 사 1:18; 롬 3:25)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 역시 용서해 주어야 할 것으로 기록되었다(마 6:12; 18:33).
그 임금이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었다.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큰 액수이었는가? 한 달란트는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6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3억 6천만 원이며, 일만 달란트라면 약 3조 6천억 원이 된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었다. 주인은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였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말하였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 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었다.
주께서 하신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것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 곧 영원한 지옥 형벌이었다.
그 종이 주인의 발 앞에 엎드려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했지만 실상 그 빚이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종의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4.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28-30)
데나리온(denarius)이란 신약 시대에 일군의 하루치 삯을 나타내는 로마인들이 발행하였던 은전(銀錢)을 말한다. 라틴어 데나리우스(denarius)에서 온 말이다. 그리스의 드라크마와 거의 같은 액수이다. 6000데나리온은 1달란트이다. 흠정역에서는 데나리온을 페니(penny)로 번역하였다. 어떤 현대 영역본들은 데나리온을 단순히 ‘은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한다. 백 데나리온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달라. 갚으리다”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의 빚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떠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5.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1-34)
동관(fellow servant)이란 함께 일하는 동료 관리를 말한다. 헬라어로는 ‘쉰둘로스’(syn-doulos; 여기서 ‘쉰’은 ‘함께’라는 뜻이고 ‘둘로스’는 ‘종’이라는 뜻)로 ‘동료’(표준새번역)를 말한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신의 많은 빚은 탕감받았지만, 자기에게 일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다(마 18:28-35).
옥졸(Jailer)에 대한 말은 감옥에서 죄수들을 감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보통 빚진 자들은 빚을 다 갚을 수 없으면 노예로 팔려가지만 때로는 빚을 다 상환할 때까지 감옥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마 18:34).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주인은 그 종에게 그가 베푼 것과 같은 긍휼을 그도 그의 동료에게 베풀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종은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주인의 말은 정당한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신약교인들은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6. 각각 중심으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주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교훈을 주셨다. 용서는 우리가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엡 4:3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