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 20
예수님의 재림
[기독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천주교]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영 어]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라틴어]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 그리고 승천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마지막 날들(말세)의 징조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기록해 놓지 않고 요한계시록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1:11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재림의 시기
예수님은 반드시 오신다. 왜냐고?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3:31을 보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어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가복음 13:32)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하지만 언제 재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이 구절에서 그 날(day)과 그 때(hour)를 모른다고 했으니 어떤 해(year)에는 오실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미혹하는 자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데살로니가전서 1:1-2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형제들아 때(times)와 시기(seasons)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언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말하는 자들은 성경을 넘어서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자신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는 마치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오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의미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미래의 사건으로 보지 말고 현재의 사건으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기독교의 종말이란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이다. 지금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경계심을 가지고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마가복음 13:35)
평안하다 할 때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3) 전혀 깨닫지 못할 때 예수님이 임하실 것이다. 이를 마태복음 24:38-39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들의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 홀연히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마태복음은 이어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태복음 24:40-41)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은 휴거에 대한 구절이 아니다. 똑같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똑같이 맷돌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그리고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구원받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심판을 받는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자신이 해야 할 현실의 일을 포기하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밭일에 충실하고 맷돌을 가는 일에 충실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주어진 일에 중실할 것에 대하여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이익을 남겼다. 그렇게 함으로 칭찬을 듣는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자는 받은 1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돌아오자 있는 그대로 돌려준다. 주인은 무척 화를 낸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30) 이러한 자들은 이제 죽을 것이니 왜 일을 해야 하는가고 삶을 포기하는 자들과 같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고대는 오히려 오늘 주어진 일에 더욱 충성하도록 만든다. 왜냐면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두고 회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흥미로운 예수님의 비유가 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10처녀 비유가 나온다. 이들이 신랑이 오길 기다리는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돌며 잤다고 기록하고 있다. 슬기로운 5처녀나 미련한 5처녀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5처녀 역시 깨어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5:4-5에서 답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깨어있다는 말은 빛 가운데 행한다는 이야기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에 대하여 마태복음 5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세상은 갈수록 부패하여만 간다. 그리고 어둠 가운데 진리의 길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죽음의 길로 걸어간다. 여기에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삶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는 자이다고 말씀한다. 물론 그 결국은 그들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데살로니가전서 5:8-9)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임함은 도적 같은 임함이 아니다. 도적은 손해나게 하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임함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이다. 오시는 시기에 관해서는 도적같이 오시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도적 같은 모습이 아니라 신부를 데리려 오시는 신랑의 모습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예수님의 초림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려 오셨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을 심판하려 오신다. 심판이란 판결을 내리는 법정 용어다. 하나는 구원을 위한 심판이고 또 하나는 지옥을 선고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은 기쁨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재앙이다. 심판의 대상은 살아있는 자들 뿐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도 해당된다. 성경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켜서 심판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29)
김성철목사의 사도신경읽기-19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기독교]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천주교]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영 어]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라틴어]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르게 번역되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셨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나라’이다.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올라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우편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마태복음 26:64와 누가복음 22:69에서는 “권능의 우편”으로, 히브리서 1:3에서는 “위엄의 우편”으로 우편에 계심에 대한 의미를 밝히고 있다.
심판의 주 예수님
빌립보서 2:6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과 동등”되신 곧 하나님 자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지시는 권능과 위엄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왜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빌립보서 2:9-11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다. 어떤 주가 되게 하셨는가? 요한복음 5:22을 보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심판이 예수님에게 맡겨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심판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심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에 따른 것이다. 요한복음 5장은 계속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어”(26절)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27절). 그러기에 누가복음 2:34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흥하고 패하는 기준 곧 사람이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게 되는 기준이 되신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이 심판의 기준이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어린양이면서 사자로서 그리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죄의 대속물로서 대신하여 죽어주심으로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의 형을 그대로 선언하시는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원주로 오셨지만 재림은 심판주로 오신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말씀대로 심판하시는 백마를 탄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왕이 주권자가 되어 다스리던 시대에는 마지막 심판주의 모습이 바로 왕의 모습이었다.
대제사장으로서
심판주로서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히브리서 8:1에서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히브리서 10:12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여기에서 예수님은 대제자상으로서 영원한 제사를 이미 드렸다고 과거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다(히브리서 9:24). 그렇게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하심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브리서 4:16) 수 있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믿는 자에게는 천국의 길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중보자로서
중보자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자이다. 이를 디모데전서 2:5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보자로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디모데전서 2:6)음으로 이미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서 예수님은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로마서 8:34에서 말씀하고 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알려져 있다. 중보자로서의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여기에서 ‘대언자’란 ‘변호인’을 뜻한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일서 2:1에서에서는 변호인의 성격을 가지고 설명한다. 대신 말하는 자란 의미다. 사탄은 우리를 밤낮으로 참소한다(요한계시록 12:10). 어떤 내용을 가지고 참소하는가?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다(요한복음 5:45). 율법대로 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신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노라고. 여기에 우리에게 무죄가 선언된다. 이는 법정에서의 선언이다. 그 결과 우리 믿는 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5-37)고 고백하게 된다.
왕으로서
빌립보서 2장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자들의 주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이를 고린도전서 15:25-26에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선포한다. 왕은 다스리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가지시고 다스리신다. 요한계시록 1:18에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로 심판주 예수님을 선언한다. 죽고 사는 것조차 예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심판을 피해 갈 자는 없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에베소서 2:1) 그리고 육신의 죽음을 당한 자들조차 다시 부활시켜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거절한 자는 예수님의 재림 때 그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전능하신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율법의 잣대로 심판하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자로서, 왕으로서 지금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