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2) 어린이에게 안수하신 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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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위에 안수하시다] (마태 19;13-15)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용납(Forbearance)이란 다른 사람의 언행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인내와 동의어로 쓰인다. 용납은 통치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잠 25:15).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형벌의 시행을 기꺼이 뒤로 늦추는 인내하시는 하나님이다(롬 2:4). 이것은 하나님의 용납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은 죄인의 죄를 그냥 묵과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롬 3:25-26; 벧후 3:15).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심을 기대하며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노하신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0:14). 이 말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순결과 겸손과 신뢰의 성품들은 곧 하나님 나라 시민의 성품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랍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과 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 머리에 손을 얹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안수(Laying hands on)는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 기도를 하거나 특별한 목적으로 성별, 헌신, 임직할 때 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다. 성경에서 안수를 행했던 사람은 집안의 가장(창 48:13-14), 제사장(민 27:23), 제물을 드리는 사람(레 8:22), 모세(신 34:9), 예수님(마 19:15), 사도(행 6:6) 등이다. 성경에 나오는 안수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제물을 위한 안수 : 번제(출 29:19), 화목제(레 3:2, 8), 속죄제(레 4:4) 등을 위해 제물에 안수함으로 제물에게 죄를 전가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레 16:21). 제물을 가져온 자는 누구나 동물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레 4:4, 24). 이것은 제의자와 제의자의 죄를 대신하여 곧 죽게 될 대체물을 동일시했던 행위였다. 제의자와 제물의 이러한 동일시는 바울에게서 성도들과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과의 하나됨으로 설명되었다(롬 6:1-14; 고후 5:20-21). (2)축복을 위한 안수 :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 위에 손을 얹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안수했고(창 48:14),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그들에게 손을 얹으셨다(마 19:15; 막 10:13-16). (3)병 고침을 위한 안수 : 예수님(마 9:18; 막 5:23), 아나니아(행 9:12, 17), 바울(행 28:8) 등은 병 고침을 위해 안수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치료 능력이 이동하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준다. (4)증거를 위한 안수 :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사형을 당했는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은 모든 증인들은 모독하는 말을 했던 사람에게 안수한 뒤 죽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잘못된 행위로 인한 죄를 그에게 돌리고 공동체의 책임을 해제했던 것이다(레 24:14). (5)후계자와 임명을 위한 안수 : 여호수아는 안수를 받음으로써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민 27:18, 23). 구약의 레위인들도 안수를 받아 회막에서 일할 수 있는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민 8:12-15). 신약의 교회에서는 집사(행 6:6), 선교사(행 13:2-3) 등도 안수함으로써 그들의 직분이 인정되었는데 안수식은 신앙공동체 앞에서 하나님의 지도자에 대한 은사와 부름을 확증시켜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는 손을 얹는 행위가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는 일과 관련되었다(딤전 4:14; 딤후 1:6). (6)성령을 전달하기 위한 안수 : 초대교회 개종자들은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행 8:17; 19:1-7). 부부이야기에 이어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은 가정의 꽃이라고 말한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별로 안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장에서 아이들이 천국에서는 큰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제자들이 다시 아이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을 보시고 아이들에 대한 가치를 재확인해 준다. 여기서 아이라는 의미는 연약한자, 소외계층, 가난한 자 등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을 예수님이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소홀하게 생각한다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위선이 되고 만다. 예수님의 위대하심은 바로 어리고 나약한 자들에게 최상의 가치를 두고 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도 바로 이 문제와 연결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러한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청년에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들을 열거하실 때(18-19) 십계명 중 단 한마디도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과 관계된 계명만을 열거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네가 소유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거나 전도비로 쓰자고 하시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언급하신 어린아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라고 했을 때는 이 청년은 그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게 되었다. 이러한 말씀들을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다. 청년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말한 것은 오늘날 교인들로 말하면 교회에서 요구한 모든 것을 성실하게 다 지켰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주일성수하고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전도활동과 함께 철야기도 금식기도와 교회 모든 조직에서 가지는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타 모임에도 충실하게 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이런것들을 수백번 잘해도 그것으로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마 7;21)라야 한다. 그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온전 할진대"(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돌아갔고, 제자들만 남았다. 민만하고 씁쓸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쉬우리라"(24-)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수 있느니라"(25-26)고 했다. 여기서 무슨 뜻으로 하신 것인가?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조건이 구비되었을 때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히든, 혹은 계명들을 잘 지켰던 것이든 구원받는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건이 있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에만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