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목사]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의 의미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함으로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고, 그 민족을 통하여 2000년 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부름은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 역사를 향한 위대한 출발이었다.
아브라함은 완성된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인물이었다. 나이가 75세나 되었는데도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우한 가장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땅을 버리고 애급으로 피난을 갔고, 피난길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를 완전한 자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들도 성장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완전한 자로의 성장과정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성장과 성숙은 우리가 부름 받은 최우선 목적이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말씀이다. 99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격적 관계가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나간 먼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 ‘전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다이’인데, 몇 가지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슴’ 혹은 ‘모태’인데, ‘풍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생명에게 모태와 가슴은 풍요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어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다.
(1) “내 앞에서” :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으시면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서”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제한시키지 말고 늘 그 분 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2) “행하여” :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히트할레크’인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이것은 특정한 일을 위하여 바쁘게 다니는 것과는 다르게 여유를 갖고 걷는 산책을 의미하며, 일 중심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를 말한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 동사는 ‘거닐다’ 혹은 ‘동행하다’로 번역된다.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는 산책 동반자 관계였다(창 3:8). 에녹이나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창 5:23, 24; 6:9), 그들 역시 하나님과 산책을 즐기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사명)을 시키시기 전에 먼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산책로로 우리들을 초청하시는 분이다.
(3) “완전하라” :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탐밈’인데, ‘완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 혹은 ‘순수함’을 의미한다.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열정과 순수함이 100% 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린아이 같아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마 19:14)고 하신 것도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순수함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당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는 ‘세대’를 의미하는데, 노아의 의인으로서 완전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통하여 우리들은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설 수 있고, 그 단계에서 또 다시 온전해지려는 거룩한 노력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고 하면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고 당부하였다.
성장을 향한 거룩한 노력은 한 단계 높은 성숙을 낳고, 그런 성숙은 또 다른 성장을 향한 거룩한 노력을 낳게 된다. 그것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