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1
요한복음 기록 목적
[요한복음 20:29-3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갈릴리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선포하는 장엄한 설교다. 사도 요한은 설교가 어떤 내용으로 전해져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모든 설교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어야 한다. 예수 중심의 설교를 하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누가복음 24:44에서도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구약 성경을 말한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묻는 질문, ‘예수는 누구인가?’에 답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한의 설교의 요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다. 요한복음 20장은 실제적인 설교의 결론이다. 21장은 예수님의 제자들 더 나아가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에 관한 것이다. 20장은 도마의 고백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선포한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이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신다. “나는 ....... 이다. I AM .......”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요한복음에 7번 나온다. 이는 자신의 하나님되심의 선언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를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로 믿고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되심을 믿는데서 시작된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
사도 요한의 설교의 중심 주제는 생명이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함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로의 바른 번역은 “예수의 이름 안에”이다.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마태복음 1:21에서 밝히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유대인들은 예수의 정확한 이름은 예수아라고 한다. 이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이다.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곧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요지는 이렇다.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생명이란 용어를 참으로 좋아한다. 구원받았다는 말을 요한복음은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다른 복음서는 하나님나라 또는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용어를 선호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강조해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그러나 구원 생명 하나님나라가 가지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에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생명의 의미는 살펴보아야 한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요한복음은 도마의 이야기로 설교를 마치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셨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 예수님은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29절에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행)복되도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는 것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는 성경은 눈으로 보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본다’를 영어로는 ‘see’다. see라는 영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보이다’이다. 보고 싶어서 본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을 표현할 때 see라는 단어를 쓴다. ‘보다’라는 의미로 ‘look’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look at me’라고 하면 관심을 가지고 나를 보라는 의미이다. watch라는 단어도 있다. watch라는 단어는 집중하여 그 내용을 보는 것을 말한다. ‘watch TV’란 텔레비전이라는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내용을 집중하여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 ‘보고서 믿는다’는 말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에 보여서 믿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들고 나온다. 예수님은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표적 중에서 7가지 표적을 선별해서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23-24을 보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결과 곧 기적의 현장을 보고(see) 믿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see)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는 누구인가라고 묻게 되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고서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2:24에서는 ‘의탁하다’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은 탁월한 번역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라는 의미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12에서는 ‘영접하다. 받아들이다’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2:24에서는 ‘의탁하다. 맡기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접하다’는 의미보다는 ‘의탁하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생명이라는 단어와 연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대 부분 환자를 치유한 것이다. 병이 치유되는 것을 예수님에게 온전히 맡겼다는 의미이다. 이 표적 가운데는 5,000명을 먹이신 사건도 나오는데 먹는 문제도 맡기고, 마지막 표적은 나사로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사건이다. 이는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도 예수님에게 의탁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것을 ‘믿는다’로 표현할 때는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놓고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어떠한 존재임을 믿는다고 할 때 영어로는 ‘believe in Jesus’라고 쓴다. 헬라어로는 ‘그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believe into him이 되겠다. 그런데 영어 표현으로는 believe into란 말은 없고 believe in이 바른 표현이다. 그런데 헬라어 표현은 into 곧 안으로 뛰어 들어가 예수라는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맡긴다 또는 의탁한다는 말의 영어는 trust이다. trust라는 단어에는 to라는 단어를 함께 쓴다. trust himself to them이란 ‘그 자신을 그들에게 맡긴다.’는 의미다.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없을 때 예수님을 떠나갈 것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표적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하고픈 설교의 중심을 이룬다. 표적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떠한 것을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설교는 7가지 표적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바로 이해하는데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