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4) 소경 둘을 보게 하심
소경 둘이 보게 됨
(마태 20;29-34)
"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29-34)
여리고(ericho)는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8km,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29km 떨어진 요단 계곡에 위치해 있는 성읍이다. 신약 시대의 여리고는 이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BC 8,000년에 건설된 여리고 성읍 안의 탑은 여리고가 인류가 거주했던 가장 오래된 성읍 중의 하나임을 말해 준다.
여리고는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으며 대륙을 연결해주는 위치에 있어서 고대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이라고도 불렸다(신 34:3).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 점령한 성읍으로 점령할 당시 백성들은 육 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 돌고 칠 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지르자 성이 무너졌다(수 6:12-25).
다윗의 자손(on of David)은 다윗의 후손을 말한다(마 1:20; 눅 1:27).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예수의 수태 사실을 알릴 때 그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으며(마 1:20; 눅 1:27),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마 9:27).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사람으로는 바디매오(막 10:47-48), 가나안 여인(마 15:22), 아이들(마 21:15) 등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바였다(삼하 7:12; 사 9:7; 렘 23:5; 겔 34:23-24).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올라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치는 길과 여리고를 지나서 가는 길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유대인들은 여리고 길을 선택해 다녔는데 예수님의 일행도 지금 여리고 길을 이용하신 듯 보여 진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을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곳이라고 할까? 아무튼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많은 무리가 따라다셨다. 마가복음에는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가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꾸짖고 말려도 아량곳 하지 않고, 소리소리 질러서 결국 예수님의 발길을 멈추게 했고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소원을 말해서 눈을 떴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은 곧 말씀이다(요 1;1-3, 14) 예수님이 여리고 길을 지나가신다는 뜻은 말씀이 모든 인생들 곁을 지나간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눈을 뜨는 것은 우리자신에게 달린 일이란 것이다. 여리고의 소경거지 바디메오, 그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지를때 방해꾼들의 꾸짖고, 억압하는 것도 물리치고 결국 예수님의 발을 멈추게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자기의 소원을 올려서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난날 하신 말씀 중에 [너희가 본다고 하니 도리어 소경 된 자들이라] 이것을 바꾸어서 [열심히 교회당이나 왕래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성경공부 열심히 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딤후 3;7), 그리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선교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소경이 된 모습 그대로라면, 지금 믿는 다는 것이 무슨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아무런 유익이 없고 무용지물이 되는 것인데,,,
분명히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지상사역의 목적지이고 종착지이다. 그곳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곳을 향해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고, 인류가 소망의 빛을 보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게 된다. 조롱과 채찍이 기다려도 사랑하는 자의 배신이 있고 아픔을 껶을 지라도 그곳을 향하여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 신약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가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받아 마실까? 21세기에 누군가는 받아 마실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잔을 마실자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길을 열 수 있다. 아무리 목매여 외쳐도 듣는 자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 조직마저도 어두움의 장막에 뒤덮여 있기 때문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여리고의 소경이 눈을 뜨는 일이 다시 한 번 더 있었으면 좋겠다.
이응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