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이응주 목사

by wgma posted Feb 23, 2017 Views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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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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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마태 21;1-11)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셨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요 12;1-12)  
금요일 오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안식일 날 마리아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무시고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었다.
1. 제자들에게 새끼를 끌고 오라(마 21;1-3)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4-6)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알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버리고 낮은 데 처하여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대하 33:12; 34:27). 이것은 성경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성도의 주요 덕목 중 하나이다(잠 15:33; 18:12; 22:4; 롬 12:3; 빌 2:3; 골 3:12; 벧전 3:8). 겸손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바라는 것이다(미 6:8).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고(사 57:15)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며(시 10:17)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잠 3:34; 약 4:10).
예수님은 자신이 겸손한 분임을 말씀하셨고(마 11:28-30)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18:1-4). 바울 역시 예수님의 겸손해지심을 말하며(고후 8:9; 빌 2:1-11) 믿는 자들의 겸손을 명령하고 있다(빌 2:3-4; 롬 12:10, 16; 고전 13:4-6). 베드로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겸손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벧전 5:5-6).
그리고 '멍에'(Yoke)는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해(삼상 6:7) 소나 나귀 등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를 말한다(민 19:2). 대개 멍에는 두 마리의 동물이 한 짝이 되어 끌게 하여서 ‘한 겨리’와 같은 말로 쓰였다(왕상 19:19, 21; 욥 1:3; 42:12). 멍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체메드’(tsemed)는 멍에로 번역되기도 하고(렘 51:23) ‘한 겨리’로 번역되기도 하였다(삼상 11:7; 왕상 19:19, 21). 그리고 멍에란 말은 때로 황소 한 겨리가 하루에 밭을 갈 수 있는 넓이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삼상 14:14).
모세 율법은 소와 나귀를 겨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신 22:10). 힘의 차이가 있는 동물들이 한 멍에를 메는 것을 금한 것이다. 멍에의 속성 때문에 멍에란 말은 속박, 예속(왕상 12:4; 딤전 6:1), 정치적 굴복(사 10:27; 렘 5:5), 고역(신 28:48; 렘 28:13), 죄 짐(애 1:14), 율법의 제한(행 15:10; 갈 5:1)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멍에보다 우상의 멍에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렘 2:20; 5:5) 그들은 ‘속박의 멍에’(호 11:1-7)를 지게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기 때문에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그분에게 배우라고 하셨다(마 11:29-30). 바울은 성도들에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고후 6:14).
이때는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된 배경이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중간쯤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신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귀새끼의 주인으로부터 미리 부탁을 했거나 아니면 영감을 통한 감동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그래서 주께서 쓰신다는 말에 즉시 나귀새끼를 내 준 것이라고 보여 진다.
문제는 준비된 나귀 새끼를 누가 가서 끌고 올 것인가? 준비된 것이라도 가서 끌고 올 자가 없다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시간적으로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예수님의 사역에는 수종들 일군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은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 한 사람은 아무런 반항 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왔다는 것이다.(6-7)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표현하고 있지만 마가와 누가는 새끼만 언급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타신 것은 나귀새끼라고 했다. 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이것은 선지자의 예언대로라고 했는데(슥 9;9) 그대로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사건이지만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왕으로서 입성하신 이가 어미 나귀라도 타야 할 것인데 하필이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인가?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8-11)  
사람들은 겉옷(Robe)을 벗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길에 깔고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환영하였던 것이다. 겉옷은 제사장이 에봇 위에 입거나(출 28:31) 보통 사람들이 겉에 입었던 옷을 말한다. 겉옷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두꺼운 망토같이 생겼으며 앞으로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활동을 할 때는 주로 벗었으나(마 24:18; 요 13:4) 예의를 갖추어야 할 자리에서는 입었다. 밤엔 겉옷을 이불로 사용했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비록 저당 잡은 겉옷이라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출 22:26).
새끼 나귀는 연약하고 성장이 미숙한 새끼인데 예수님께서 타셨을 때에 새끼라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을 텐데 구태여 그 새끼를 타셔야만 했을까? 성경학자들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겸손하신 왕이기 때문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요 격식이 필요 없는 자유로운 왕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여기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여러 가지 상징정인 많은 사건이라고 생각이 들게 된다. 아직 힘이 없고 다 성장하지 못한 어린 나귀의 등에 올라타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타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힘이 있고, 모든 것을 충분이  갖추고 위엄이 있어 보인 그러한 나귀를 타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메시야의 참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도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명예나 권력이 있어도 외적으로 휼륭한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유는 나사렛 예수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힘에 겨워도 예수님을 등에 태운 것만으로도 한평생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예수님은 찾고 기다리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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