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
1장(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이 아니라 표적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첫 번째 표적(2장)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표적은 변화이다. 단순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보이는 기적에만 경이로움을 표한다면 표적 읽기에 실패한 것이다. 표적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변화를 가져온다. 제대로 묻자. 표적을 보고 사람들은 묻는다. 예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1장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반복해서 같은 답을 내어 놓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누구인가?(1:1-18) 말씀(1) -> 육신이 되신 말씀(14) -> 독생하신 하나님(18)
세례 요한의 증언(1:19-34) 하나님의 어린 양(29) -> 하나님의 아들(34)
제자들의 증언(1:35-51) 메시야(41) -> 하나님의 아들(49)
첫 번째 표적에서 변화를 본다. 무엇으로부터(from) 무엇으로의(to) 변화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변화의 결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먼저 변화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1:14).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소식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말씀이라고 선포한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요한복음 1:1의 태초를 쉽게 창세기 1:1의 태초와 비교하여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는 시간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의 태초는 시간개념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의 태초를 시간개념으로 오해하게 된 이유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역에 있다. 70역은 창세기 1:1의 태초를 요한복음 1:1의 태초란 단어와 같은 단어로 잘못 번역한데서 비롯된다. 요한복음 1:1의 태초란 단어의 헬라어는 ‘아르케’다. ‘아르케’란 단어는 당시 헬라 철학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서양 철학은 시작한다. 탈레스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이 질문에 답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아르케)는 물이다. 탈레스 이후 사람들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탐구해 왔다.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성경은 선포한다. 만물의 근원은 말씀이다. 1:3을 보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래서 요한복음 1:1의 선언은 모든 만물이 있게 한 곧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한 근원으로서 말씀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만물은 그 시작이 있지만, 말씀 자체는 시작이 없는 스스로 존재하는 근원이다. 히브리서 11:3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고백한다.
말씀이
모든 표적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모든 표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표적을 만들었다. 요한복음 1:1에서 말씀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로고스’다. ‘로고스’라는 단어를 철학의 개념으로 사용한 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고 했는데, 그는 모든 것은 변한다고 했다.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하는 그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용한 단어가 바로 ‘로고스’라고 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화하는 모든 것 가운데 결코 변하지 않는 그것이다. 요한복음은 세상천지는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말씀은 단지 선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한대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을 보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창조되어진 사실을 선언한다.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의 선언과 창세기 1:1의 선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본다. 창세기 1:1은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요한복음 1:1은 말씀의 존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말씀을 한 인격체로 선언한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선포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에 성자 하나님이 그 뜻을 말씀으로 나타내신다. 실제로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뜻이 있기에 말씀으로 선언된다. 이런 면에서 말씀은 아들이라 칭해진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사람은 뜻 따로 말 따로 일 때가 얼마가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있으면 그 뜻이 그대로 말씀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일하심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늘 함께 함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시해서 말씀하신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곧 아들이지만 아버지와 동일시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유대인들은 이에 분노한다. 어떻게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가? 이에 요한복음은 분명한 어조로 선포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놀라운 표적의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확고한 선언이다. 요한복음의 결론에 해당하는 도마의 고백을 보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하나님으로서 창조에 함께하신 말씀
어떻게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있느냐고? 그 근거로 요한복음은 창세기 1장의 창조로 설명한다. 창세기 1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말씀이 없이 창조된 것이 있는가? 없다. 말씀이 없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만물을 시작하게 한 근원으로서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함께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말씀 역시 하나님이 아닌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하나님이심은 놀라운 선언이 결코 아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 놀라운 그리고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선언은 바로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 되신 말씀, 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왜? 도대체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는가? 요한복음은 무어라고 하는가? 사도 요한의 장엄한 설교에 귀를 기울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