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대법관 퇴임,
"늘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퇴임한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
2011년 ‘법률신문’과 취임 100일 인터뷰서
여성 재판관으로서의 삶 풀어내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끈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55세, 사법연수원16기)이 13일 오전 퇴임식을 가졌다.
서울 A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온 이정미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임기 6년을 포함해 30년 동안의 공직생활에 대한 소회를 밝힌 뒤 감사의 신앙고백으로 퇴임 인사를 마무리했다.
이정미 권한대행은 “헌법재판관이라는 자리는 부족한 저에게 참으로 막중하고 무거웠다”며,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해 보이는 그 자리가 실은 폭풍우 치는 바다의 한 가운데 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여성재판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여성이 기대하는 바도 잘 알고 있었다”며, “어떤 판단이 가장 바르고 좋은 것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지난 2011년 2월 이정미 대전고법 부장판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할 당시 “여성 인권과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시대적 요청에 가장 적합한 후보"라고 밝힌 바 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기까지의 고뇌도 털어놨다.
이정미 권한대행은 “우리 헌법재판소는 바로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며,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결정을 함에 있어서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절차를 진행하면서, 헌법의 정신을 구현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 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을 치유하자는 당부도 남겼다.
이 권한대행은 “이번 진통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보다 성숙하게 거듭나리라고 확신한다”며, “이제는 분열과 반목을 떨쳐내고 사랑과 포용으로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끝으로 헌법재판소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신앙고백으로 퇴임 인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늘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하여 늘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정미 권한대행의 짧은 퇴임사가 박근혜 대통령 파면 당일 보여준 '헤어롤' 못지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정미(55·사법연수원 16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오늘 오전 퇴임했습니다. 취임사에서 “소수자와 약자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듣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한지 6년 만입니다.
취임 당시 1988년 헌법재판소 설립 이래 두 번째 여성 재판관, 비서울대 출신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퇴임 직전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이라는 역사적인 선고의 주인공이 됩니다. 헌재소장 권한대행으로서 ‘2016 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 심판을 이끌었던 그는 선고 당일이었던 지난 10일 출근길에 분홍색 헤어롤 2개를 머리에 꽂은 것을 잊은 채 차에서 내렸습니다. 다른 7명의 재판관과 함께 그가 얼마나 이 선고에 공을 들이고 집중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를 떠난 이 권한대행의 인생을 잘 보여주는 인터뷰가 있습니다. 헌재 재판관 취임 100일을 맞아 2011년 7월 <법률신문>과 한 인터뷰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드러나기도 하고, 여성 법조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노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 권한대행의 퇴임을 맞아 인터뷰 내용 중 인상적인 부분을 소개합니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문을 읽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0·26이 바꾼 진로
학창시절 수학 선생님을 꿈꿨던 이 권한대행은 1979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를 앞두고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한 10·26 때문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 사회 모습에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일까 생각하다가 법대에 진학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권한대행은 198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들어가 8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87년 법관으로 임관했습니다.
여성 법조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한 이 권한대행은 서른을 넘겨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늘 보따리를 들고 다니고 애들이 자면 이후에 일을 하고 아니면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했다. (…) 여성이 소수이다 보니 조금만 일에 소홀해도 눈에 띄었다.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여성 법조인에 대한 평가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2010년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를 거친 그는 2011년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습니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었습니다.
판결에 대한 소신
그는 “헌법재판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담스럽다”고 말했습니다. “판사로 있을 때보다 언론에 노출이 더 많이 되기 때문”이라는데요, 6년이 지나 돌아보니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소신도 밝혔습니다. 2011년 당시 이동흡 전 재판관을 포함한 9명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연수원 기수가 가장 낮았던 이 권한대행은 “기수가 낮거나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이 권한대행은 퇴임 뒤 특별한 계획 없이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이라는데요, 6년 전 인터뷰에서는 “큰 틀에서 공익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그 쪽으로 활동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했습니다. 큰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이 권한대행의 앞날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