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5
1장(2) : 말씀. 생명. 빛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표적을 중심으로 선포되는 장엄한 설교이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의 의미는 변화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 이 놀라운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다고 요한복음은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말씀으로 나타나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제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과 연관되는지를 설교하고 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의미다.
(1) 타락한 세상은 참된 구원이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왜냐면 타락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했고 버렸고 마침내 잊어버렸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다. 이에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알려주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계시하셨다. 인간에게 있어서 비밀이었던 구원의 길이 마침내 알려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결코 인간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요한복음은 구원이란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려준다.
(2) 요한복음은 생명이란 단어로 ‘조에’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단순히 숨을 쉬며 사는 생명체인 ‘바이오’가 아니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너와 나의 관계와 연관이 있다. 서로가 행복한 관계는 생명이 있는 관계이다. 만나면 서로가 불행인 관계는 지옥이다. 마침내 서로의 관계가 끝나고 잊어진 관계는 서로에게 대하여 죽음의 관계이다.
(3)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이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생명나무가 에덴동산에 있었다. 그리고 이 생명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연관시키고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죽음을 거론한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소멸이 아니라 관계의 분리 또는 단절을 의미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이야기다.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나무에 가는 길이 차단된다. 그룹들과 불 칼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징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절한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차단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죽음이다.
(4)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그룹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제도를 주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 성막은 성막 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구별되어 있다. 지성소에는 법궤(언약궤 증거궤)가 있는데 법궤의 뚜껑을 죄가 속해지는 자리라고 해서 속죄소 또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고 해서 시은좌라고 한다. 이 속죄소 위에 두 그룹이 마주보고 있다. 하나님은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만나주시겠다고 알려주신다. 인간들의 죄가 속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자가 없다. 그러나 그 그룹은 속죄소 위에 있다. 인간을 지옥의 죽음으로 인도할 율법을 가리고 있다. 어떻게 죄가 속해지게 되었는가? 성막 뜰에 가면 번제단이 있다. 번제단에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이 제물로 바쳐지는 자리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죄가 속해진다.
(5)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번제단에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될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곧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를 속해주는 속죄소가 되셨다. 그렇게 인간은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곧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6)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타락한 인간이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 곧 생명을 얻게 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생명 곧 사람들의 빛
(1) 빛은 모든 사물을 바로 보게 한다. 그리고 원하는 사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로서의 빛을 의미한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을 생명으로 곧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알려준다. 곧 빛을 비춰준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는 길이 비밀이었다. 그 비밀이 예수님이 오시자 분명히 들어나게 되었다. 누가복음 2:34에 보면 성전에서 메시아(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므온이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자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고 기뻐한 장면이 나온다. 이는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 곧 생명과 죽음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분명해졌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는 선언이다.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이신 말씀 곧 예수님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겠는가고 고백한다(요한복음 6:68).
(2) 요한복음 빛을 다르게 진리라고 표현한다. 빛은 진리를 의미한다. 진리란 무엇인가에 답을 얻으면 빛이란 무엇인가가 나온다. 요한복음 14:6이 설명한다. “내(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창조주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란 생명 에 이르게 하는 길, 곧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길이다. 참 빛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길 곧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빛과 진리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3) 빛이 어둠 가운데 비췄다. 그런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아왔다. 그런데 구원의 끝이 달랐고 그 끝은 죽음에의 길이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길이었다. 어떤 종교는 스스로 깨닫는 자가 해탈을 얻는다고 했다. 해탈이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모든 것은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결국 자신이 죽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기독교만이 성경만이 생명을 이야기 한다.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진정한 생명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다. 그런데 어둠이 하나님께 인도하는 참 빛이신 빛 곧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에서 ‘깨닫다’는 헬라어는 ‘힘껏 붙잡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힘껏 붙잡는 것을 요한복음 1:12에서는 ‘영접하다’로 표현하고 있고 일반적인 의미로 ‘예수님을 믿다’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이 생명이 되시고 빛 곧 진리가 되심을 힘있게 설교하고 있다. 말씀과 생명 그리고 빛으로서의 예수님은 잘못 인식되고 있는 빛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1장은 계속 설교한다. 요한복음 1장은 성경 전체를 한 장으로 모두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장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설교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