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6
1장(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의 첫 번째 표적에서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셨다. 당연히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요한복음 세 마디로 정리한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매
[18]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다
(1)감추어진 뜻과 생각은 언제나 말로 드러나 보이게 된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말씀으로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비밀이 공개되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에 대하여 물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로 답하셨다. 진리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생명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곧 하나님께 인도하는 길이 진리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렇게 빛이 되었다.
(2)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디모데전서 3:16을 보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이시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이 참조했던 헬라어 원문은 ‘하나님’으로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 곧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3)그런데 흥미로운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신’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좋은 의미를 나타내기 보다는 ‘정욕’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인간의 욕심 을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사는 삶의 모습을 ‘육신’으로 나타낸다. 결국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 되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히브리서 4:15은 예수님이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라고 선언한다.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육신을 가진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셨기에 사탄은 감히 예수님을 시험하러 덤빈 것이다. 히브리서 4:15은 더 나아간다.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셨지만 예수님은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여기에 우리는 희망을 본다.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죄와 싸워 승리하셨다면 우리 역시 그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삶이 아닌,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그리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 속에 담겨있다.
(4)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말씀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는 요한복음에는 당신 영지주의라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바른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헬라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결코 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단지 사람이라는 옷을 잠시 입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자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선포한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다. 그것도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을 가진 육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이신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율법과 은혜
(1)이제 요한복음은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정리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 율법과 은혜를 이분법적으로 접근하지 말자. 우리는 쉽게 율법과 은혜를 서로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이나 은혜는 둘 다 사람을 살리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한 것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다고 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의 최고봉이 십계명이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지나쳐 버린다. 십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은 서언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0:2) 보라! 무엇이 먼저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율법을 지켰기에 출애굽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오해했다.
(2)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막이라는 제도를 두게 된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는 성막에 나아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대신하여 짐승을 죽게함으로 대속해 주는 곧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경험토록 했다. 곧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인도하는 교사가 되었다. 이를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을 들어 설명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24)
(3)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구약의 선지자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소개해왔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였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는 자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빛이 아니고 빛을 증언하는 자였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는 구약의 모든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선언과 같다. 요한복음 5:39에서 말하는 성경이란 곧 구약 성경을 말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은혜와 진리
(1)성경은 빛을 진리라는 말과 동일시하여 사용한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은 진리로 오셨다는 말이다. 진리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한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생명이 우리에게 왔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선언이다. 마태복음 1:23은 이렇게 표현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어떻게 타락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은혜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인간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에게 다가갈 기회가 주어진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로서 주어진 성막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러한 면에서 진리는 언제나 은혜와 함께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충만하다고 하나님의 기쁨을 전한다. 14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매”라는 말은 하나님의 기쁨을 보매로 이해하면 되겠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7
1장(4) 독생자 하나님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은 표적으로 풀어가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이다. 첫 번째 표적의 주제는 변화다. 변화의 결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요한복음 1장은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부터 선포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8은 독생자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방식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방식(사람의 뜻)과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경고는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 후손이기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육정으로 곧 선한 행위를 따라 구원이 주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주어진다. 요한복음 1:12을 보면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는 자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2)인간을 구원하시는 곧 사람이 영원한 생명(영생)을 얻게 되는 방식은 하나님이 정한다는 것인데 하나님 방식의 가장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3)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된다. 하나님을 거절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을 저지러온 인간의 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식이었다.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하여 행하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방안이 제시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것이다. 이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소개한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는다. 예수님의 세례받으심은 죄인인 인간과의 연합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인간의 죄 문제를 걸머지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다.
독생자 하나님
요한복음 1:18에 나타난 “독생하신(독생자) 하나님”을 영어성경 NIV나 ESV는 “외아들”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only one Son)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한글 성경은 “독생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로는 begotten Son 이다. 성경의 요절이랄 수 있는 요한복음 3:16을 보자.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KJV] his only begotten Son
헬라어 원문은 ‘모노게네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모노(유일한)’과 ‘기노마이(되다)’가 결합된 단어이다. ‘기노마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기노마이 become)”에도 쓰인다. 풀어서 설명하면 “그의 독생자”란 ‘하나님이 유일하게 아들이 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라는 대명사는 ‘하나님’을 말씀한다.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력한 성경구절이다.
‘모노기노마이’라는 단어는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사람이 낳은 외아들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사도 요한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로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가 쓰인 히브리서 11:17에서 아브라함의 외아들이라는 의미는 또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이 낳은(겐나오) 유일한 아들이란 뜻인데, ‘낳다(겐나오)’란 단어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낳다’라는 영어 단어는 ‘beget’이 쓰였다. NIV에서 번역한 “Abraham was the father of Isaac”는 정말 잘못된 번역이다. ‘겐나오’라는 단어는 위에서 설명한 ‘기노마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삭이 곧 아브라함과 같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에서 ‘겐나오’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할 때에 쓰이는 단어이다. 여자가 자녀를 낳을 때는 ‘팈토’라는 단어를 쓴다. 영어로 말하면 여자가 낳는 자연적 출산은 ‘bear’라는 단어를 쓰고 아버지가 자녀를 낳는다고 할 때는 ‘beget’이라는 단어를 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이는 곧 자신이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8은 하나님이 사람이 사는 세상에 나타나신 바 되었는데 그가 독생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독생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님되심을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니믕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하나님)를 보았다”(요한복음 14:9)고 선언한다.
제자들의 고백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다)를 가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제자었던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리고 묻는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한복음 1:38) 이 질문은 아주 흥미롭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와 대비된다.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간결하다. “와 보라”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자리인 메시아이심을 본다. 그리고 각기 형제인 베드로와 야고보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개한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히브리어로는 시므온)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게바(아람어로 베드로와 같은 의미인 반석이란 뜻을 가짐)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이렇게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등장한다.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었던 빌립 역시 예수님에 의해 제자로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빌립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모세와 선지자들(구약 성경)이 예언했던 나사렛 예수(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이다)를 나다나엘(학자들은 바돌로매일 것이라고 추정함)에게 소개하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고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주고받는 대화가운데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한복음 1:49)고 고백한다. 요한복음의 결론적인 신앙고백인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과 닮아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을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다가 예수님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신앙고백을 한 점에서 닮아있다.
요한복음 1장은 변화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선언적 선포이다. 말씀으로서의 하나님,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진리), 사람이 되신 하나님, 독생자 하나님, 인간의 구원자로서 오신 어린양, 곧 인간의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요한복음은 선언적으로 선포하면서 앞으로의 놀라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나다나엘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이보다 더 큰 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한복음 1: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