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석 선교사] 유럽의 이슬람역사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성장했던 곳에서 내리막길을 걸을 때, 성장해 왔던 종교가 이슬람이다. 과거 중동은 전체 인구의 95%가 교회에 출석하던, 비잔틴 기독교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인 국가들로 바뀌었다. 또한 유럽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기독교가 꽃을 피워 전 세계에서 개혁주의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오늘의 유럽은 이슬람의 중심지로 변해가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인 것이다. ‘유라비아(Eurabia)’라는 단어는 유럽에 사는 아랍 사람들의 연합과 결속을 위하여 1970년대에 만들어진 잡지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제 이 ‘유라비아’라는 단어는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간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중동 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2004년 독일신문 벨트(Die Welt)와의 인터뷰에서 “늦어도 21세기 말에는 유럽의 인구 중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다.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여, 현재 약 25만 명이며 비공식적으로는 40만 명이 넘는다. 1990년 이후에 한국으로 들어 오는 인력 가운데는 이슬람 국가인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70%는 아시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유럽 이슬람의 모습은 내일의 한국 이슬람의 모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유럽 이슬람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이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1. 이슬람의 시작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마지막 전투는 비잔틴 제국과 벌인 것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크리우스(Heraclius, 재위 610-641년)는 10만 명의 병력을 끌고 무함마드 군대와 맞섰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무슬림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비잔틴 기독교 제국을 정복해 나갔다. 634년부터 638년에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이슬람 군대는 636년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시리아를,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10년 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대부분을, 이후 70년 동안 서쪽으로 진군하여 북부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하였다. 북부 아프리카를 강화한 후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와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남부 프랑스와 서부 지중해를 점령했다. 1453년 3월 29일은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장악한 날이다. 1480년 로마제국의 마지막 흔적인 이탈리아의 도시 오트란토(Otranto)를 파괴하였다. 그 도시에서 12,000명을 죽였고,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을 톱질로 사형시켰다.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오스만투르크는 유럽의 4분의 1을 차지하였고, 1863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가까이 왔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유럽과 북유럽 해안가의 사람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해적들로 인한 공포 속에 살았고, 무슬림 해적들은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힘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1757년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군대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쳤다.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타냈다. 18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유럽은 전쟁과 힘으로 거의 모든 이슬람 지역을 정복하였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가장 큰 이슬람 인구가 있는 지역, 그리고 아프리카와 동남아를 정복하였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를 합병하였고, 프랑스는 동북 아프리카를 정복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산맥으로 진출했고, 이탈리아는 뒤늦게 제국주의에 뛰어들어 리비아와 소말리아를 합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 세계를 나누어서 통치했다. 19세기와 20세기 오스만투르크의 분열로 인하여 내리막길을 걷기까지, 이슬람은 유럽의 최대 적(敵)이었다. 유럽 역사의 암흑기부터 이슬람은 유럽에 대단한 위협이 되었다. 7세기와 8세기 사이에 이슬람 군대는 로마제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프랑스의 작가인 힐러리 벨렉(Hilaire Belloc, 1870-1953)은 1938년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 이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쇠퇴해 가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유럽 문명을 상대했던 어마어마하고 집요한 적(敵)이며, 과거에 유럽을 위협했듯이 미래에 위협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는 이슬람이 유럽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 사이의 끔찍한 투쟁을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벨기에의 역사학자인 헨리 피렌(Henri Pirenne, 1862-1935)에 따르면, 오늘날의 유럽은 이슬람에 의하여 그 지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통일됐던 유럽이 이슬람의 침략으로 깨졌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삶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변하게 됐다. 유럽과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함께 발생했으며, 서로에게 도전하는 존재였다. 이슬람은 19세기와 20세기 급격히 하락하기까지 유럽 문명 최대의 적이었다. 유럽 역사의 암흑시대부터 이슬람은 유럽의 심각한 위협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 이민 발생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른,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 1939년 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 제국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끝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서유럽에서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노동력이 필요했고, 당시에는 남유럽이 이를 제공했다. 1980년대까지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큰 이민 그룹이었다. 또 다른 노동력은 동유럽인이었으나 이는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제약됐다. 그 대신 유럽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국가들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에는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노동이민자들이 들어 왔다. 후에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드골(Charles De Gaulle)은 “프랑스는 기독교에 위협이 되는 국가들과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고향에 있는 두 개의 교회는 모스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와 알제리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 편에 섰던 알제리인들은 보복이 두려워 프랑스로 몰려왔다. 그 수는 약 7만 5천 명이었다. 프랑스에는 1973년까지 약 1백만 명의 북부 아프리카 무슬림들과 그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약 4백만 명까지 됐다. 현재 프랑스에 약 6백만 명의 무슬림 가운데 알제리인이 35%를 차지한다. 다른 35%는 모로코와 튀니지 출신이다.
프랑스 이슬람 인구 대부분이 북부 아프리카인이라면, 독일은 터키인이다. 1961년에 독일에서 터키인은 단지 수천 명에 불과했었지만, 1976년 약 1백만 명, 1990년 중반에는 약 2백만 명으로 늘었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터키 이슬람 인구 중 3분의 2를 차지한다. 독일에서는 매일 터키 신문이 35만 부씩 팔리고 있다.
모로코인과 터키인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이슬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에는 수리남에서 온 무슬림이 약 10%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수리남이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의 이슬람은 주로 인도인이다. 약 절반은 파키스탄, 25%는 방글라데시와 인도 무슬림이다.
노동 이민자들에 의하여 1970년 중반까지 유럽 경제는 번영을 누렸다. 무슬림은 1960년 네덜란드 경제 성장의 중심이었고, 노트르담 인구의 반은 무슬림이다. 유럽연합의 수도인 브뤼셀의 인구 중 20%가 무슬림이다. 프랑크푸르트 인구의 40%가 외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이민자이며, 8명 중의 1명은 터키인이다. 비엔나 인구의 20%가 무슬림이다. 1990년 이후 두 배로 성장한 것이다.
이슬람 사원으로 변한, 터키 이스탄불 비잔틴교회. ⓒFIM국제선교회 제공
3. 오늘날 유럽의 이슬람
유럽에 이민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 1950년대 60년대, 그리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이슬람이 이렇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치가들이나 평론가들은 “이슬람이 유럽의 ‘제2의 종교’”라고 상투적으로 말하면서 자신들이 관대한 것처럼 표현하였다. 덴마크의 종교학자 앤더스(Anders Jerichow)는 “이슬람 종교를 가진 이민자들이 30%를 차지하는데도, 공청회 내용 중 이슬람 종교에 대한 부분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슬람을 유럽의 제2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미래 전망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은 유럽의 제1의 종교이다.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유럽이 아랍 세계의 전초기지로는 변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유럽에는 계속해서 무슬림이 증가하는 국가들이 있다.
유럽에서 이슬람의 존재가 드러난 사건은 1989년 영국에서 인도 출신 소설가인 살만 루시디가 ‘악마의 시’라는 작품을 낸 것이었다. 당시 이 작품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유럽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루시디가 살해 협박을 받으면서, 이슬람 문제는 유럽에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1989년은 프랑스 이슬람에게 있어서 분수령이었다. 3명의 중학생들이 교실에서 베일을 썼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 열차의 폭탄 테러로 인하여 192명이 숨지고 1,240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어서 영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무슬림 2세들에 의하여 벌어진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로 56명이 사망했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4년 11월 네덜란드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데오 반 고흐(Theo van Gogh)가 ‘굴종’(Submission)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모로코 무슬림 2세 무함마드 부바리(Mohammsd Bouyeri)에 의하여 살해되면서, 유럽의 이슬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2005년 9월 덴마크 언론(Jyllands-Posten)의 무함마드 만평 사건으로 인하여 중동의 덴마크 대사관에서는 테러 및 방화가 발생하고, 이슬람 국가들은 덴마크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 논란은 전 유럽의 무슬림들을 자극했다. 2005년 11월 프랑스의 북부 아프리카 이주민 2세 청소년들이 소동을 일으켜서, 두 달 동안 350개의 도시에서 300여 채의 건물과 6,400대의 차량을 불태우는 등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2015년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가 만평에서 무함마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잡지사의 편집장을 비롯하여 12명이 목숨을 잃는 테러가 발생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130명이 사망하고 340명이 부상당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슬람과 유럽은 서로 적대적이며 배타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은 절망적이다. 독일에 거주하는 시리아 출신 학자 바삼 티비(Bassam Tibi)는 버나드 루이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유럽은 지금 “이슬람이 유럽화되든지 유럽이 이슬람화되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FIM국제선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