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읽기 8
성전 회복 (2:13-22)
[요한복음 2:16]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요한복음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기적을 본다. 첫 번째 표적의 주제는 ‘변화’다. 모든 표적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끊임없이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묻게 하고 답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답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를 위해 먼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아로 등장한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아,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제 가나의 혼인잔치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들어가는 것이었다.
구약의 결론
(1)가나 혼인잔치로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행보는 왜 신약은 복음의 선포인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구약의 예배는 제사예배였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회개의 통곡이 성전을 휘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죄 문제로 통곡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한 다. 신약의 예배는 잔치라고 선포한다. 왜냐고? 죄의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았음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신약의 예배다. 더 이상 죄 용서를 위해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다.
(2)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어디를 향하여 흐르는가를 알아야 한다. 구약의 흐름은 무엇으로 끝을 맺는가? 그것은 성전회복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하게 세우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맡겨진다. 솔로몬으로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성전을 대하는 왕들의 태도에 따라 왕국의 흥망이 결정된다. 이스라엘 왕국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망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포로의 삶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유대인들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되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이 구약의 결론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요한복음이 기록한 것이 바로 성전 청결 사건이다.
성전 뜰에서 무슨 일이?
(1)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있다(2:14). 전혀 문제가 없는 그림이다. 멀리 있는 지방에서 짐승을 가지고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의 편리를 위해 성전에서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를 사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했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성전 세겔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3). 그러므로 성전에서 벌어지는 사고파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그렇다면 예수님의 분노는 왜?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예수님은 밝히고 있다(2:16).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자들의 편리가 아니라 제사장들의 이익 사업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제사장그룹은 사두개인들이 맡고 있었다. 예배가 예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예배가 이용당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선언한다. 곧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다. 성전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를 바로 인도해야 하는 사두개인들은 예배보다는 돈에 관심을 두었다. 여기에 물건을 파는 자들 역시 예배를 돕기 위해 있는 자들이 아니라 장사 속으로 물건을 팔고 있었다. 예수님의 분노가 여기에 있다. 이에 예수님은 성전 청결을 위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본래 모습으로 돌려놓고자 성전 청결사건을 일으킨다.
(3)구약의 결론은 성전의 회복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신 목적이었다. 타락한 인간 세상에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의 소굴이 되었다. 성전의 타락이다. 예수님은 성전 청결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
가나 혼인잔치를 통하여 예고된 변화는 성전의 회복으로 시작한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채찍을 들고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시며 돈을 쏟고 상을 뒤엎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한다. 이런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예수님이 성전을 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을 헐어보라고 하신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결과로서 눈에 보이는 것을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를 보라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해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 3번째 지어진 성전이었다. 첫 번째는 솔로몬에 의하여, 두 번째는 스룹바벨에 의하여, 세 번째는 헤롯에 의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이에 요한복음은 영적 의미를 들여다본다.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성전을 헐어버린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성전이 다시 지어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표적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말씀하고자 하는 변화는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관된다.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진다. 타락한 인간이 다시 창조주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제대로 믿자 (2:23-25)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성전 청결사건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의도를 성령 하나님의 임함과 함께 이해했고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명을 걸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흩어졌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결과만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의탁하지 않고 그들을 피하여 떠났다. 왜냐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전을 장사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장사는 거래다. 믿음을 거래의 수단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다. 믿으니까 자신의 원함을 이루어 달라는 것은 일종의 거래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믿으니까 이스라엘의 독립을 책임지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으라고 했다. 이건 거래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거래하지 않는다.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께 의탁한다. 2:24에 등장하는 ‘의탁하다’는 말의 원문은 ‘믿다’이다. 곧 제대로 된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히 의탁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 나의 원함이 아니라 내 자신을 예수님의 원하심에 온전히 맡긴다. 내 마음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대에 나를 맞추는 자가 제대로 믿는 자이다. 의탁한다 또는 온전히 맡긴다는 의미로서의 믿음의 표현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잘 드러난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구원받음으로 주어진 회복은 바로 성전의 회복이다. 이는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의 놀라운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