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1)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

by wgma posted May 12, 2017 Views 39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태복음 22장(1)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

(마 22;1-7)

KakaoTalk_20170119_221630423.jpg



22장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장면은 혼인잔치에 비유 이야기로 시작 된다. 여기서는 21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에 이어서 혼인 잔치의 비유 이야기로 앞장에 나온 포도원 비유에서 악한 농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여기서는 아들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아들을 위해서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1-4)


혼인(Marriage)이란 남자와 여자가 장가가고 시집가서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관계 가운데 하나로, 성경에는 이방인과는 혼인하지 말 것이 명령되어 있으며(신 7:3), 이방인과 혼인할 경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이 예언되어 있다(수 23:12-13).


구약에서의 혼인에 대한 모습은 원래 일부일처제가 창조의 질서였는데(창 2:18-24; 고전 6:16), 가인 이후부터는 일부일처제가 깨어지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궁중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인은 일부일처제였으며,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가운데 나타나는 인물 중에는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가 예외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혼인 때에는 남편 될 사람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이것이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창 34:12; 출 22:15-16; 사 18:25). 보통 그 금액은 신부의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었는데, 대개는 50세겔 미만의 돈이었다. 또 혼인에서는 신부에게 선물이 주어졌는데, 창세기 34:12을 보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장식품 및 옷을 선물하고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풍성한 선물을 제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신부의 아버지가 딸에게 선물로 여종(창 24:59; 29:24) 혹은 토지(수 15:18)를 준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혼인 후에 준 것이었다.


또한 자녀들이 나이 순서대로 혼인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일찍 혼인을 했으며 혼인 문제에 있어서는 부모의 결정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혼인 이전에 약혼을 했는데, 약혼은 오늘날의 약혼보다 훨씬 더 공식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징집이 면제되었고(신 20:7), 타인의 약혼녀를 강제로 강간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신 22:25).


신약에서의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막 10:6; 고전 6:16). 그래서 바울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앙에 의해서 결혼을 금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비판했다(딤전 4:3). 또한 혼인을 믿음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고 재림의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여 “아내 있는 자들이라도 없는 자와 같이”(고전 7:29)하라고 말했으며 또한 순결을 강조했고(고전 5장) 이혼을 반대했다(고전 7:10).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를 혼인한 부부의 관계로 묘사하여, 자신은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다(고후 11:2-3).


예수님의 혼인에 대한 입장은 일부일처제로,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해 주므로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회복시키셨다(마 5:31; 막 10:2-12; 눅 16:18). 그리고 혼인 잔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어 복음서에서는 천국을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로 서술하고 있다(마 22:2-14; 눅 12:16-2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행하신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는데(요 2:1-12), 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의 성취자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로 말하며 예수님이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임을 말하고 있다(요 3:29).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신랑이 되셔서 그의 신부인 성도들과 결합하는 기쁨과 그 영광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계 19:7-9; 21:2, 9).


이스라엘에서 혼인식의 광경은 혼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부가 남편의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신랑도 머리에 관으로 장식을 하고(아 3:11; 사 61:10), 북을 치고 노래 부르는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들어간다. 신부는 화려한 옷을 입고 값진 장식품을 달지만(시 45:14), 얼굴에는 너울을 드리웠다. 그러다가 혼인식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 너울을 제거했는데, 야곱이 초야에 라헬과 레아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창 29:23). 신부는 여자 친구들과 같이 자기 신랑에게로 인도되고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서 신랑과 신부의 장점을 칭찬한다(렘 16:9).

보통 혼인 잔치는 신랑의 집 마당에서 베풀어졌으며 7일 간 계속되었고(창 29:27; 삿 14:12) 두 주간으로 연장되기도 했다. 이 잔치는 가장 즐거운 잔치였으며 혼인 자체는 첫 날 밤이 지난 다음 완성되었고, 혈흔은 순결에 대한 증거로 남겨졌다.


한편 구약에서 호세아나 이사야 등은 남편과 아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했는데(사 62:4; 호 2:19-20), 이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남편을 배신하는 여인으로,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용서하고 변화시키는 남편으로 비유되었다.

잔치(Banquet, Feast)는 경사가 있을 때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잔치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창 19:3; 삼하 3:20), 아이의 젖을 뗐을 때(창 21:8), 결혼 시(삿 14:10), 추수를 마쳤을 때(삼상 25:11; 삿 9:27) 등에 베풀어졌다.

대개 잔치는 손님들이 함께 모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호화스러운 일이었다(암 6:4-6). 잔치를 베푸는 자는 조심스럽게 누구를 초청할 것과 손님들을 어디에 앉힐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특히 자리를 배치하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풍습은 예수님께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마 23:6)를 바리새인들이 선호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셨던 배경이며, 누가복음 14:7-10의 자리의 비유에 대한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를 기다리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잔치)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 25:6)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온 신자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잔치에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지만, 악한 자들은 제외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8:11-12).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결혼 잔치를 준비하여 손님들을 초청한 어떤 임금으로 비유하셨다(마 22:1-14). 그 당시 잔치 초청을 무시하는 것은 공개적인 거절의 표시였다.

계시록은 훗날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즐겁게 연합하는 모습을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계 19:6-7)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잔치를 베푼 주인이 화를 낸 이유가 있었다. 한 사람이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잔치 당일 날 어떤 사람은 밭을 사서 못 오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소를 사서 못 오겠다고 했고, 결혼을 해서 못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은 화를 버럭 내며 아무나 데려와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했다(눅 14:15-24). 잔치를 베푼 주인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예수님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 잔치의 풍습은 1주일 전부터 예약을 받았다가 잔치 당일이 되면 종들을 보내서 초청된 사람들을 모셔오는 것이 전통과 전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비유된 이야기에서도 초청받은 사람을 모셔 오도록 종들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초청을 거절한 것이다. 이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초청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처음에는 예약해놓고 막상 잔치 당일에 못 오겠다고 거절한 것이다. 잔치 석을 준비한 왕은 얼마나 민망하고 기막힌 일인가? 그래도 참고 종들을 또 보냈지만 끝내 거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절한 이유들이 있었다.

1) 오기를 싫어하고

2) 또 보내니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사업하려가고,

3) 남은 자들은 데리러간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고...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왕은 성부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초청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고

데리러 간 종 들은 선지자들이다.

혼인 잔치 자리에는 먹을 것이 부족함이 없이 준비된 자리였다.

여기에 준비된 음식은 생명의 떡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초청을 거절한 것이다. 

마태복음 21장(7) 건축자들이 버린 돌




건축자들이 버린 돌

(마태 21:42-46)


KakaoTalk_20170119_221630423.jpg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2-43)


건축자(Builder)는 돌, 나무, 진흙 등을 가지고 건물을 짓는 석수, 기술자를 말한다. 석회암이 

풍부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거대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단단한 돌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을 짓기 위한 돌을 기술자들과 함께 두로에서 수입했다(왕상 5:17

-18; 대상 14:1). 솔로몬이 벌였던 대규모 건축 사업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건축술은 한층 발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머릿돌(Capstone)은 건축의 최종을 장식하는 돌을 말한다. 이 단어는 견고함, 안정됨, 

기초가 됨을 상징한다(사 28:16; 렘 51:26; 욥 38:6). 스가랴는 포로지에서 돌아와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도 제 2의 성전이 완성될 것을 격려하는 의미로 머릿돌을 언급하였다(슥 4:7). 이 머릿돌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 21:42; 행 4:11; 엡 2:20).


여기서 건축자들의 돌 이야기는 시편 118;22-23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인데, 사도들도 이 말을 

인용했다(행 4;11, 벧전 2;7). 악한 포도원 농부 이야기를 하시다가 왜 갑자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야기를 하셨는가?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결론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건축자들은 지금 유대교지도자들을 두고 한 말이고, 이들이 버린 돌이 버린 머릿돌이란 말은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너희가 나를 버리지만 나는 만백성들이 거할 하나님의 집의 머릿돌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여기서 열매는 믿음을 말한다. '너희는' 이라고 해서 지금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을 두고 한 말인 반면, 열매 맺는 사람을 말할 때는 백성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지도자라 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아무런 신분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천국의 백성은 이 땅에서 종교직책(사역자 혹은 성직자)을 갖는 자들이 아니라 아무런 직함이 없어도 예수를 인정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44-46)


똑 같은 말씀을 듣고 똑 같은 기적을 보고도 지도자라 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악감을 가지고 죽일 계획만 하고 일반 백성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알고 인정하고 있다. 이 같은 반응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귀신들려 눈먼 자를 고쳐 주었을 때도 일반 군중은 '이는 다윗의 자손(메시야)이 아니냐 하고 기뻐할 때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폄하했었다(마 12;22-24)


여기서 엇갈리는 반응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가? 그것은 사람들의 입장차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보인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기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배척했고, 일반 군중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본대로 들은 대로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라고 했던 사람들은 유대교가 직업이었다. 구체적으로 돈 벌고 먹고 사는 직장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 활동을 하면서 번 돈을 유대교에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산헤드린 의원들, 바리새인들은 모두 유대교라는 종교의 틀 속에서 먹고 살고, 그 기반을 근거로 활동했던 직업인 들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바치면 힘겹게 사는 백성들이고 받는 쪽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로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종교구조의 모순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셔서 모순된 부분들을 지적하신 것이고, 드디어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시고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이 구조를 헐어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종교구조의 속박에서 백성을 해방과 자유를 주신 것이 예수님이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셨다. 어느 시대든지 반드시 종교 세력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끊임없이 등장되어 사람과 신(神) 사이에서 직업 활동을 해 온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해체시켜 버렸는데도 또 다시 등장되고 반복되어 온 것이다. 과연 사람은 종교구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다시 종교의 노예가 되고 반복되어 온 것이 예수님 다녀가신 후에도 계속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부분을 두고 탄식해서 쓴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여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강조하면서 당부했다.


결국 종교형태가 지배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헛것이 되고, 사탄은 양의 옷으로 위장하고 이번에는 십자가 사건을 내세워 고등종교를 만든 것이 중세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중세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유대교 보다 더 심각하게 교권을 잡고 휘두른 종교집단이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사탄의회라고 규정하고 다시 만든 것이 개혁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개혁교회는 어떤가? 지금 기존 교회를 지키려고 하는 지도자들에게는 좀 듣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이해를 바란다.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전통적 유전에 근거한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종교의 틀을 깨 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었는데 그 본질은 감추어지고 전통적 종교의식에 복음의 옷만 입혀 만든 것이 로마교회였고, 개혁교회역시 출발하면서 중세종교의 전통에 옷만 갈아입힌 것이 지금의 개혁교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현재 내가 입고 있는 종교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아무런 편견 없이 말씀을 검토하고 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종교지도자 즉 성직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바리세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있다면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만들 수도 있는 긍정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4134609b9913a96b896424f52f72a23.jpg




Articles

1 2 3 4 5 6 7 8 9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