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14
4장(1) : 한 여인의 변화 1
요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표적들은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잔치(2장)에서 읽게 되는 것은 ‘변화’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2장에서 포도주는 혼인잔치의 흥겨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요한복음은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생이라고 계속해서 설교한다.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영생의 문제를 제기한다(3장).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의 문제 곧 이스라엘 독립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에수님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생의 문제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다고 선언한다.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회복(독립)이라는 국가적 담론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났다면,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등장하는 한 여인은 일상생활의 문제와 만난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하는 문제다. 수가 동네의 한 여인에게 있어서 당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이러한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어떤 자에게는 경제문제일 것이고 어떤 자에게는 건강의 문제일 것이다.
갈증의 문제
(1) 4장에 등장한 인간의 문제는 ‘목마름’ 곧 ‘갈증’의 문제다. 예수님은 이 갈증의 문제를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19:28)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취급될 수 없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 조차도 밟기를 싫어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갈 때 사마리아를 비켜서 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신다. 예수님이 만나시는 대상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예수님에게 다가 오는 것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고 함께 하셨다. 그렇게 영생의 복음은 특정한 부류에게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지나서 땅 끝까지 곧 전 인류에게 전해진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과는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전 인류가 구원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
(2) 이스라엘 땅은 물이 풍성한 땅이 아니다. 그곳에서 물은 아주 귀한 것이었다. 수가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통해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물을 제공받고 있었다. 바로 이 우물 곁에 예수님은 인간의 피로를 느끼고 쉬고 있었고 한 여인은 이 우물로부터 필요한 물을 가져가기 위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 대화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은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했지만 이 여인은 유대인의 한 남자를 보고 있다. 물이 본질이다. 목마른 자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물을 달라고 하는 한 유대인의 남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자기는 사마리아 사람 당신은 유대인 그런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 우리는 서로 상종하지 않고 지내왔잖아. 지금 당장 물이 필요한 자에게 물 조금만 주면 되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물 한잔이 서로 서먹한 관계를 회복되게 한다. 그런데 목마른 자에게 물 한잔이 아니라 줄 수 없고 요구할 수 없는 다른 문제를 들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유대인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오직 이스라엘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있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음을 예수님은 큰 아들 둘째 아들의 비유등을 들어 끊임없이 이야기 하신다. 마침내 사도행전에서 구원은 이스라엘 사람이 되지 않아도 주어진다고 선언한다.
(3) 예수님은 이 여인의 지적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본질인 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예수님은 한 사람의 유대인이 아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닌 진정한 의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는 자로서의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 여인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친다. 4:10을 보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두 가지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야곱의 우물은 여인이 수고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야곱이 수고하여 만들어져 있는 우물이었다. 여인은 단지 와서 퍼가면 되었다. 수고함없이 거저 주어진 것 선물의 의미다. 그런데 야곱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있다. 그것이 생수다. 14절에 설명한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원히 솟아나는 물이다. 물은 일시적인 갈증은 멈추게 하지만 다시 갈증을 가져온다. 그러나 생수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한다. 두 번째는 생수를 주는 자이다. 수가 동네의 물은 야곱이 수고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생수는 누가 주는가? 여인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답을 찾으려고 한다. 니고데모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다.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 하는데 여전히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단 목을 축이고자하는 것과 같다. ‘그런 우물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큰 자입니까?’ 눈에 보이는 우물을 찾는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말하는 물은 야곱의 우물에서 주어지는 물과 다르다. 내가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는 한번 마시면 영원히 솟아나는 물 곧 생수다.’ 여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한 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답을 얻으려고 한다. 우리 역시 그러하다. 구원을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주어진 약속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 병고침 방언 경제적인 부의 양등으로 믿음을 측정할려고 한다. 그러니 여전히 예수님을 믿어도 인간의 목마름은 계속된다.
(4) 예수님은 이제 여인의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삶의 갈증문제를 끌어 온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4:16) 여인은 없다고 답한다. 예수님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의 남편 역시 남편이 아니니 여인의 말이 맞다고 말씀한다. 왜 예수님은 여인의 아픈 문제를 건들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갈증난 삶을 해결하는 방식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논란은 많지만 있는 그대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에는 여자들 스스로는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남편이 죽었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이 여인은 남자에게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삶의 현실이 짜증스럽고 답답했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제는 여섯 번째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여섯 번째 남자는 남편이라고 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피로가 예수님이 피곤하여 우물 곁에서 쉬고 있는 예수님과 겹쳐 보인다. 삶의 갈증, 만족할 수 없는 삶의 피로감.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갈증을 해결할 것들을 찾아 나선다. 전도서는 이러한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결론은 헛됨이다. 여인은 이제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생수의 문제가 단순히 마시는 물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여인의 답이 달라진다.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그러나 아직 여인은 답답하다. 더 이야기는 전개된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여인은 마침내 메시아 예수님을 고백한다. 그리고 갈증의 문제를 해결한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예배의 문제
여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답답함을 예배의 문제를 제기하며 풀고자 한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유대인이면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인 니고데모보다는 진일보한 모습을 여인이 가지고 있다. 왜냐면 예배의 문제를 거론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갈증문제는 하나님을 바로 만날 때 해결된다. 여인과의 만남에서 갑자기 예배문제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가 예배문제와 연결되고 있다. 예배문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읽기 15
4장(2) : 한 여인의 변화 2
니고데모는 자신의 문제(이스라엘의 독립)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다. 반면에 사마리아 수가 동네의 한 여인은 자신의 문제(물을 얻기 위해)를 가지고 우물에 왔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야 쉬고 있던 예수님을 만난다. 한 사람은 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고 한 사람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다. 어찌했든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믿음)을 바꾸고 계셨다. 더 나아가 그들이 진정 예수님께 얻어갈 것은 니고데모에게는 영생이었고, 수가 동네의 여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었다.
예배의 문제
(1) 물로 상징되는 수가동네 여인의 문제는 갈증의 문제였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 갈증의 문제는 마시는 물로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 삶의 문제로 옮겨간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삶 싫던지 좋던지 남자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여자의 문제가 있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한다(4:19). 그러자 여인은 예배의 문제로 대화를 바꾼다. 이는 자신의 부그러움이 드러나자 대화를 바꾼 것이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은 영의 문제 곧 신과의 만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2)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예배장소가 달랐다. 이들은 곁으로는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예배의 장소가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명기 12:6을 보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그런데 왜 다르지? 여인의 궁금함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기원전 322에 건축)에서 예배했다. 예수님은 여인의 예배관를 바꾸어 주신다.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는 거짓 예배였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4:22)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진정성이 없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 예배의 문제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할 대상에 있다.
(3)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와 함께 교제하는 삶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진정 찾아야 하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진정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있었는가?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의 장소를 가지고 있던 유대인은 어떠한가? 이방인들은 또한 어떠한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 그리고 중동지방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신들을 섬기며 예배하고 있었다. 한쪽은 거짓된 신에게 예배하고 있었고 또 한쪽은 형식적인 예배였다. 이에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식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3) 여기에서 ‘영’은 형식적인 예배를 꾸짖는 것이고 ‘진리’는 거짓된 예배를 책망하신 것이다. 참된 신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하고 그 예배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드리는 영적 예배여야 한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은 참 예배가 이루어지면 다시는 목마름이 없을 것임을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내포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4) 여기에서 포인트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이다. ‘영’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음’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의미다. 이를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 곁에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보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중심을 보신다. 여기에는 거짓이 들어올 틈이 없고 내용은 없고 오직 형식만이 판을 치도록 넘어갈 수 없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는 오직 진실된 마음만이 오가며 참된 것만이 통한다. 그리고 이것이 참된 영적 예배이다.
(5) 여인이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예배 곧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 하시는 이가 오실 때일거라는 것이다(4:25). 이런 면에서는 유대인이었던 니고데모보다는 낫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드러나 있는 율법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해 있는 율법의 논리를 깨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심을 강조하여 선언하신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이방인의 대표격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마리아 수가동네의 여인에게는 틀에 갇혀있지 않다. 단지 진정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갈증난 삶에서 해방되리라는 소망을 안고 있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4:25)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로라.”(4:26)
여인의 변화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었다. 예수님 그가 바로 여인이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였다. 이제 여인의 변화를 보자. 4:28-29이다. 첫째 변화는 ‘물동이를 버려두고’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버렸다. 물동이로는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영원한 생수를 마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갈증에서 해방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렸다. 성경은 이 ‘버렸다’는 동사를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변화는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어지는 두가지 변화이다. 버린다 그리고 알린다. 왜냐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영원히 사는 삶이 주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복음이다. 결코 이제까지의 삶에다가 생명이 더해진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전혀 다른 영원한 삶이 주어진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영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영생 곧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알리려 가는 사이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돌아왔을 때 주어진 대화로 이어진다.
양식의 문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먹을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간 사이에 수가동네 여인을 만나고 있었다. 이제 여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네에 가고 그 사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들고와서 예수님에게 잡수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고 말씀하시면서 그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고 밝힌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원의 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이는 복음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오심은 영생으로의 길로서 선포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을 자를 모으라고 하신다. 이미 추수할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여인이 전한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다. 그리고 수가동네 여인과의 대화의 마지막은 “그(예수님)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42)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사를 영생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생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선언이다. 수가동네 여인과의 대화에서 주어진 선언의 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