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다(행5:1-11)
2017.5.28 아가페선교교회 주일설교
은혜 시대에 사는 우리가 때로 구약의 성도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을 직접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바꾸어 생각하면 정말 겁나는 것입니다.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초대교회와 같은 징계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아마도 교회들마다 시체가 넘쳐나고 날마다 장례식이 치러질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내용은 성경에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와 삽비라(사파이어/ 아름다운)의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둑놈이 도적절하는 것은 뉴스가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가 도둑질하고, 카지노에 가고, 바람을 피우면 뉴스가 됩니다. 교회는 산 위의 동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행동, 신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밭을 팔아 헌금을 한 것은 아마도 바나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행 3:36,37).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권위자입니다. 바로 권고하고 위로하는 자입니다.
자신들도 바나바처험 칭송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부부가 일부의 헌금을 가져온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재산의 절반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일부를 헌금하고, 일부를 가져간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들 부부의 죄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들의 문제는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것처럼 속인 것에 있습니다. ‘감추다’ 란 말은 횡령을 의미합니다.
(행 5:4)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 한 것이로다.”
이것이 이들 부부의 죄의 본질입니다. 일부를 드리고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전부를 드린 것처럼 믿게 한 것이 죄입니다. 이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싫어하십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말은 인생 비극의 시작입니다. 도산 안창소 선생의 말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장난으로도 하지 말라, 꿈속에서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거짓말 하다가 망했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이런 비극을 모르고 3 시간 후에 삽비라도 역시 망했습니다. 부부가 쌍으로 망한 것입니다. 1절, “아나니아가 그의 아내 삽비라아 더불어“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9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아여” 이래서 결혼할 때에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브리스굴라와 아굴라 부부같이 영적으로 함께 복을 받고, 후세에 존경받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돕는 베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달리 성경은 정직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어머니 라헬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속이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정직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먼지와 같은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붙잡았으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물질에 집착하여 영적인 삶을 부인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을 손제 잡았으나 결코 그것을 써보지 못했습니다. 이들 부부도 역시 그 소유를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과거 주님과 3년 동안 지내며 배운 것보다 지금 이 순간에 더욱 분명하게 주님의 뜻과 사역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권징(discipline)
분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조성된 그 때의 분위기는 아무도 성령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 부부의 죽음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그 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교회의 순결함에 대해서 놀라야 합니다. 이는 강제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주장하시는 성령님의 활동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은 순결함과 교회의 거룩함입니다.
초대 교회는 비록 작지만, 아름답고 순결하고 거룩한 성령의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뜻을 세우고 주님의 뜻을 알리는 도구였으며, 교회는 사랑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한 거짓된 사람이 들어왔으나,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부자라고 해서 눈치보고 비위를 맞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으로 꾸짖었습니다.
(행 5:2)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베드로는 그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행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청년들이 아나니야를 장사하고 난 후 세 시간 쯤 지나서 삽비라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옵니다.
(행 5:8)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것뿐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삽비라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하고, 삽비라는 지금까지 되어진 일을 알지 못하고 남편과 같은 대답을 하자,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왜 주의 성령을 시험느냐?’ 고 꾸짖습니다. 이제 삽비라 역시 혼이 떠나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 부부가 저주를 받아 죽은 이유는 마음속에 사단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시험한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신 역사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때는 거기에 하나님의 갑작스런 심판이 있었음을 봅니다.
그러면 이 시대 교회에서 권징이 왜 약화되었습니까? 이는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잡족(雜族)들로 인하여 그 민족의 영원한 저주가 되었던 것처럼, 교회에 더러운 가라지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더러운 것이 들어오면 교회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크기와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교회는 순결해야 합니다. 기드온의 32,000명의 군대보다는 300명의 군대가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청년(Neotelos)
지금 아나니아의 시체가 예배당에 엎드려져 있습니다. 교회에 경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천벌을 받은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시체를 장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젊은이들입니다. 보통은 교회의 굳은 일들을 누가 합니까? 노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릅니다.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청년들이 이 일을 자발적으로 하고 나섭니다.
아나니아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 약 세 시간 후에 또 다시 시체가 예배당에 엎드려져있습니다. 그야말로 줄 초상이 났습니다. 성경에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이번도 역시 장례를 담당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번에도 역시 청년들(네오테로스)이 장례식을 감당합니다. 누가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교급인 네오테로스를 사용하여 강조합니다. 이들이 젊은이중의 젊은이요, 진정한 기독청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청년들이 초대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용감하게 교회를 세우고,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은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며, 또한 이 시대 교회의 소망입니다. 부패한 교회, 소망을 잃어버린 교회, 절망적인 시대를 개형한 사람들 역시 마틴 루터 같은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시대마다 교회의 부흥을 주도하고, 선교의 피를 흘린 이들 역시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에 참여해 보았고, 장례예배를 집례했었습니다. 장례식을 통해 보고 배우고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청년들 역시 장례식을 치르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처럼 살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불의와 타협하고 권력과 돈 앞에 아부하면 그 시대와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권징의 결과
(행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권징의 결과는 두려움(fear)과 능력(power)입니다. 일로 “온 교회가 두려워하였으며, 담 밖의 사람들까지 두려워하였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하심과 순결하게 역사하심에 경외심과 함께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교제 속에서 진실로 서로 속이고, 거짓되게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거짓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성령이 떠나가던지, 아니면 아나니아 삽비라가 떠나던지 해야만 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거짓되고 가증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담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가 물론 사랑이 넘쳐야 하지만, 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할 때에 세상에서 방황하던 영혼이 교회에 들어와서 치유함을 받고 힘을 얻게 될 것이며,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담 밖의 사람들이 왜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왜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고 조롱합니까? 교회가 더러워 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더러운 것이 들어오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 청년들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아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의 피가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에 성령의 순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어서 교회에 들어오는 입구에서 불의하고 거짓된 것을 불사를 수 있다면,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행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상종하는 이가 없으나 백성이 다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또한 특별한 능력의 증거들이 뒤따랐다.
(행 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심지어 병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이면 자신들의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순결함이 있고, 순결한 그곳에 축복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위기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는 깨끗해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병자들을 거리로 데리고 나와서 뉘었다는 것은 교회의 순결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 즉 육체적 정신적 치유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결론
본문의 이야기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멸망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치유의 역사로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멸망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생명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을 속이는 자에게는 심판이 되시지만, 당신의 긍휼을 바라고 나아오는 자는 싸매시고 치료하는 여호와가 됩니다.
교회가 순결하게 될 때에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며, 교회사를 통하여 이는 확실히 입증됩니다. 순결한 교회는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충만한 교회가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순결케 하시는 이는 내주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복종하는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순종함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며,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위기를 만났습니까? 내일이 Memorial Day입니다. 언제나 위기를 찬스를 동반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세계의 꽃다운 청년들이 피 흘려 한국을 도왔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똧다운 나이에 이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피흘려 순교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기의 때에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를 잘 압니다. 그 지혜란 머리가 좋다거나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태도’ 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가페선교교회(담임: 강진구 목사)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치료하고 회복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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