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16
두 번째 표적 : 왕의 신하 (4:43-54)
요한복음을 표적을 중심으로 읽어가고 있다. 요한복음은 표적이 보여주는 결과 곧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지 말고 그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가나 혼인잔치를 통해서 보여준 표적의 의미는 변화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로 이끌어 간다. 니고데모(3장)와 수가동네 여인(4장)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생과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진정한 예배로 인도하는 메시야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로 관심을 바꾸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제 요한복음은 두 번째 표적으로 넘어간다. 이 두 번째 표적 역시 첫 번째 표적이 일어났던 가나에서 주어진다.
왕의 신하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의 신하다. 신하는 왕의 말에 따르는 자이다. 두 번째 표적에 왕의 신하가 등장하는 이유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의 이야기가 갈리리 지방에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그러한 소문을 들었던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에서 약 4-5시간을 걸려서 가나로 예수님을 찾아온다. 자신의 아들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와서 고쳐주기를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신다. 그것이 전부다. 직접 가서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다. 두 번째 표적에서 강조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더니”(4:50) 정말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100% 믿고 갔을까? 두 번째 표적에서 왕의 신하가 등장하는 이유다. 그는 신하로 왕으로부터 언제나 명령을 듣고 왕의 말을 듣고 실행한 자였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백부장의 종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백부장은 말한다. “말씀만 하옵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누가복음 7:7-8) 신하는 이러한 명령과 순종에 익숙한 자이다. 왕으로부터 명해진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신하는 100% 믿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하로 익숙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간다. 가는 도중 종들을 만나 자신이 아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그때에 나은 것을 알고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된다.
두 번째 표적의 의미 : 말씀대로 이루어지다
두 번째 표적의 의미는 말씀이다. 첫 번째 표적의 의미는 변화다.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위는 오직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3:5)고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하인들은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두 번째 표적은 그래서 이러한 표적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것을 선언한다.
창세기 1장으로 들어가 보자. 천지창조에서 되풀이되면서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이다. 히브리서 11:3에서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선언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만물은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선언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이러한 성경의 선포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그의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왕의 신하 아들이 이미 살았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함은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창세기 12장을 더듬어 가보자. 가장 중요한 문장 하나를 고른다면 그것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창세기 12:4)이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자들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장군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아만장군이 나병의 고침을 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간다. 나아만장군은 당시 가장 이름있는 장군이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엘리사의 손을 나아만 자신의 문제가 있는 곳에 손을 얹어 낳게 할줄로 알았다. 그런데 들려온 것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 그뿐이었다. 그것도 엘리사 본인은 나오지도 않고 종을 보내 전해준 엘리사의 말뿐이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그냥 자신의 나라 아람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종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열왕기하 5:14) 행하였더니 나병이 낫게 되었다.
내 소원이 믿음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가지고 왔던 생각(믿음)은 말씀으로 씻기어져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한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한다(19:37).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서 믿는 자가 되지 말고 말씀을 믿으라고 요한복음은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보지 뭇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결론짓는다(20:29). 성령의 가장 기본적인 일은 바로 우리를 진리 곧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선어한다(16:13).
표적의 결론으로 보여지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보라. 거기에서도 예수님은 오직 말씀만 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대로 행한다. 이렇게 요한복음에 기록된 모든 표적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고 결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두 번째 표적이 강조하는 바는 말씀대로 이루어짐이다.
영생의 말씀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을 잊어버리지 말자.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붙여있는 이유를 베드로의 입을 통해 고백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6:68)
성경은 구원의 문제를 병리학적으로 자주 설명한다. 두 번째 표적은 병든 왕의 신하 아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회복이다. 병이 치유되었다.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종종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네가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시곤 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고는 인간이 구원받을 길을 알 수 없다고 선언한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선포는 성경은 진리라는 의미다. 그럼 진리란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는 예수님이 말씀에 답이 있다. 진리란 생명 곧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는 ‘진리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바로 예수님 생애의 결론인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거기에 영원한 삶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약속 곧 새 언약이 주어진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복음이다.
첫 번째 표적이 보여주는 것은 변화라면 두 번째 표적을 통하여 주어진 것은 변화는 말씀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말씀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1%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 보라. 내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변화된 삶으로 인도해 갈 것이다. 왕의 신하는 그렇게 아들이 나음을 받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