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도전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옵니다. 어떤 때에는 더럽게 일이 꼬일 때가 있고, 절망 가운데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구에서는 유머(humor와 센스(sense)가 있는 사람을 인정합니다. 위트(wit)라는 것은 배를 카고 가는데 암초를 피해가는 기술을 말하고, 머란 배가 암초에 걸렸을 때에 물을 채우고 그 위를 지나가는 겄을 뜻합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 살벌하다. 눈감으면 코를 베가는 세상이 아니라, 눈 뜨고 있는데도 코를 베어 가는 세상입니다. 그 살벌한 세상에서 결코 낙심하거나 기죽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견디고 이겨나가는 사람이 유머가 있는 사람입니다. 유머가 있는 사람은 그 어려움과 한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묵묵히 소화 해 냅니다. 울고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선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그 실력을 유머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기막힌 경우를 만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과 배짱을 가지고 원한과 절망을 극복해 가는 것이 신앙의 유머요 기질입니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삭발한다고 하면 일종의 투쟁적 의미입니다. 노조원들이 삭발을 하고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들이 머리 깎고 머리 띠를 두르고 열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님이 삭발을 하는 것은 출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에 중.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에 삭발을 했었고, 훈련소에 들어갈 때에 삭발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단체와 규율에 메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절대 머리를 안 깎고 수염을 안 깎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서 수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꼽까지 내려올 만큼 매우 깁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고 하여, 머리를 자르지 않고 상투를 하고 수염도 길렀습니다.
외경을 보면 바울은 대머리였습니다. 대머리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구레나룻이 많습니다. 바울이 수염이 길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겐그레아에서 다 깎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아주 충성스럽고 소중한 동역자가 생겼습니다. 브리스굴라아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옛날부터 부부 사이가 좋은 사람을 금슬(琴瑟)이 좋다고 말합니다. 금(琴)은 거문고를 말합니다. 그리고 슬(霧)은 비파를 말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잘 어울려 연주되면 최상의 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그러므로 부부가 잘 어울리면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소리가 나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런 면에서 금슬 좋은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귀족이었고, 아굴라는 유대 청년입니다. 이들이 tent 사업을 잘해서 돈을 벌었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든든한 동역자를 만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갈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머리를 잘랐을까요?
바울은 그 동안 1차,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주로 유대인의 회당(Synagoue)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복장과 머리가 한 몫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의 공회원이었습니다. 공회원은 당시 대단한 권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공회원의 복장과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엄이 있고, 또 권위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방향을 틀어서 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 아덴으로 갑니다.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던 유명한 철학의 도시를 방문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름대로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덴 사람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몇 명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들에게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했습니다(행 17:18-33). 그래서 좌절이 되었고, 아마도 이 때에 서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서원이 무엇일까요?
그 동안 바울은 회심을 하고서도 14년 동안 유대인으로서 공회원 복장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회당을 찾아 쉽게 전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회심을 하고서도 14년이 지난 시점에(갈 2:1) 갑자기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그 서원의 시작은 3년 전 드로아로 향할 때, 삼층천의 체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후로 이 서원을 잊고 지내다가 아덴에서의 좌절과 아픔을 통해 서원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 동안 14년 간이나 입었던 공회원의 복장과 머리와 수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머리를 깎을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깎은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에게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강론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이제는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고 오히려 회당에서 쫓겨나게 됩니다(행 18:19).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고,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드디어 바울은 유대인이 아니라, 본격적인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에서 안디옥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전도여행을 마치는 시점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복음이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전파됨을 증거하고, 자신의 달라진 복장과 머리를 예루살렘 교회에 당당하게 보여주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 2:1;3)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 때부터 바울의 복장은 달라졌습니다. 공회원의 복장을 벗어 던지고, 세례 요한처럼 가죽 옷을 입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죽옷은 바로 野人(야인)의 옷입니다. 바울의 서원이란 그 동안 지켜온 유대교의 전통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중에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교인들도 나중에는 말립니다. 그때 바울이 매정하게 말합니다.
(행 18:21)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앞으로 환란이 올 것이라는 것을 바울도 알았고, 에베소서 교인들도 알았고, 장로들도 알았고, 겐그레아 교인들도 알았습니다. 그럴 때 바울이 머리를 깎으며 서원한 내용이 ‘내게 앞으로 많은 환란이 올 것이지만, 유대교의 전통을 버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 이런 서원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고 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회당에서 환대받던 바울이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게 됩니다. 멸시와 핍박을 받아 옥에 갇힙니다.
(행 23:12,13)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 하고 이같이 동행한 자가 40명이더라” 예루살렘으로 간 바울은 당장에 체포됩니다. 감옥에 넣은 것도 모자라 바울을 가이사라로 이송할 때에 아예 죽이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계략을 들은 바울의 조카가 천부장에게 전하고 천부장은 밤 3시 야간을 틈타서 바울 위해서 보병이 200명, 마병이 70명, 창군이 200명 총 470명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은 멋쟁이이십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았는데, 47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통령 경호보다 더 안전하게 바울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하면 돈이 안듭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일이 쉽게 풀립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편지까지 써서 변호해 줍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 주님께서 바울에게 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 사명을 가진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킬러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했지만,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감옥이 아니라, 헤롯 궁전으로 보냅니다. 사실 이 때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지 23년이 지난 후입니다. 23년 동안 바울이 복음전도를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23년 만에 2년 동안 안식년을 맞은 것 같습니다. 거기서는 굉장히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굉장한 로마의 지성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대가 브루스(F. F. Bruce)는 「바울」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분은 바울의 옥중서신 가운데 골로새서는 분명히 가이사랴에서 썼다고 주장합니다.
이곳에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로마의 고위층 인사들을 쉽게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바울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겐그리아에서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기를 ‘앞으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더니 선하게 이끌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자유롭게 옥중서신을 쓴 것입니다. 후에 바울이 갇혔던 로마 감옥에는 황제 밑에서 일하던 정치 고관들의 이름이 거기에 다 적혀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에서도 감옥이 로마의 최고 고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빌 4: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가이사 네로 밑에 있는 거물급 정치가들 몇 명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벌써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갔지만, 모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바울의 생애를 주관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들에게 할례에 대해 자유하게 하였습니다(행 15장). 이건 정망 엄청난 사건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 전도를 위하여 자신들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할례에 대한 족쇠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 마침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오늘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순교당한지 250 여년 만에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바울을 죽이고 베드로를 죽인 그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행 18:21)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인생의 생사화복, 역사를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의탁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은 사건입니다. 의미있는 사건입니다. 겐그리아에서 바울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렸습니다. 머리를 깎고, 유대교의 옷을 벗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지막 생명보다 바꿀 수 없는 그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생명, 생사화복,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면서 내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11년 전에 처음 온 동네가 바로 이곳입니다. 저는 이 동네를 떠났지만, 10년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이 지역에서 실패하고 자존심 구겨진 곳입니다. 싫어서 떠난 곳입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흘러 저를 다시 이곳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었고, 이 Alpharetta GA 지역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마지막 남은 자존심 버리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맡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기업을, 자녀들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맡겨야 합니다. 위기를 만났습니까?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무기력한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 일생에 turning point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회개의 timing 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머리를 깎는 변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타성에 젖은 일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성폭행 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습니다. 뭐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 가도 되나?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살던지 죽던지 뜻대로 하소서’ 찬송하면서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높이시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요셉 때문에 인류가 살아남았고, 하나님의 뜻이 후세에 전달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주인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 혼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만은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는 자존심,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죽어도 놓지 못하겠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는 것 같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중대 결심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중대 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가페선교교회(담임: 강진구 목사)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치료하고 회복하는 교회!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
주일예배: 오전 11시, 수요예배: 오후 8시, 금요예배: 오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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