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4) 가장 큰 계명
(마 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4-40)
율법사가 질문한 계명(Commandment)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계명이란 종교적인 용어이면서, 윤리 도덕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정을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창 26:5; 출 15:26; 레 22:31; 27:34)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신약에서는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마 22:36-40; 막 12:28-34)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복음서에서는 십계명뿐 아니라 율법의 다른 규정들도 가리키고 있다(마 5:19). 예수님은 모든 계명의 핵심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셨고(마 22:36-40; 요 13:34) 바울은 계명을 율법과 결부시켜서 해석하였다(롬 7장).
그런데 지식을 자랑하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놀라서 돌아갔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이번에는 나서기로 의논하고 예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고 질문했다. 과연 율법사답게 질문을 한 것 같이 보이는 내용이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동시에 전통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대답은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하게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 질문을 하신 것이다.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자. 사랑하라고 했는가? 아니면 섬기라고 했는가? 그러면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어떻게 하라? 고 했는가?
여기서 하나님과 이웃을 '그와 같이'라고 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똑같이 동등하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강령'이란 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줄거리의 핵심이란 말인 동시에 연결된 고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강조해 온 말이고 율법이 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이것(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여기서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란 것을 주목해야 하고, 그 사랑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논의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전통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주제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부터 여러 차례 다루어 온 바와 같이 현금의 교회구조 내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냐? 전통이 우선이냐를 놓고 판단을 한다면 지금이라도 분명하게 답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라고 분명한 고백만 되면 쉽게 답은 나오게 된다. 이론적으로 간단하게 답은 나오지만 답에 맞는 구조로 바꾼다는 것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좀 어려운 주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기독교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느냐? 부터 의논이 되어야 하는데 즉 '교회는 종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인가? 이러한 개념부터 정리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때는 기독교는 분명하게 종교 중의 하나가 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 구조를 만들었고, 기독교는 종교 중의 하나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회가 종교가 될 때는 예수 십자가 사건은 종교를 위한 교리만 될 뿐, 피의 효력이 능력으로 표현 될 수가 없다는데 약점이 있다.
여기서 섬김의 대상이냐? 사랑의 대상이냐 하는 말부터가 생소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로서는 피곤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이런 주제를 취급하게 된 것은 혹시라도 미래 교회의 파라다임(Paradigm)의 도출을 위한 일에 소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에서 언급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논의를 하지 못한 다면 중세 교회 때 모양과 같이 비틀어진 모습으로 굳어지고 말 것이다.
요한복음 21;15-17절을 읽어 보면,
첫 번째 질문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첫 번째 그의 대답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두 번째 질문에서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두 번째 그의 대답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질문에서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17)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하는 장면을 읽을 수 있다.
세 번째 대답 할 때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문제는 세 번째 대답 할 때는 근심하면서 대답했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다른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면서 같은 대답을 들으셨던 것인가? 빌라도 법정 앞에서 지난날 어린 계집아이에게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심지어 저주하면서 까지 부인했기 때문인가?(막 14;68-71, 눅 22;57-60) 물론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형식으로 말씀을 나누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찾아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무슨 뜻이 담겨진 말씀인가? '네가 나를 사랑 한다면 사람을 챙기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요한 1,2,3서를 참고)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강령이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요구하고 계시는가? 신약시대 백성은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가 우리 안에'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이라고 믿는다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