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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성서와 땅(1): 땅의 기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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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창 2:8)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이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이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지칭한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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