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시 139:1-24)
2017. 8. 13 아가페선교교회 주일설교
사람들이 인기스타를 부러워하지만, 누군가가 속속들이 다 알고 있고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다면, 삶이 자유하지 않습니다. 잠자는 모습,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을 스토커가 날마다 나를 따라다닌다면 기분이 참 더러울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1-5)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하고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나를 잘 모릅니다. 내 속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사람도 없습니다. 답답할 땐 정말 내 속을 누군가에게 다 털어 보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기에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가 언제 나의 약점을 가지고 뒤통수를 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대편이 나를 몰라준다고 속상해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나의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모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기의 현실과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지만, 나의 약점을 가지고 뒤통수치지 않고 항상 곁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를 이미 아시고, 나도 감당하기 힘든 나를 완벽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진짜 경험한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4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은 입에서 우물거리고 아직 꺼내 놓지 않은 속마음도 가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스토커처럼 따라다니시면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까? 아니면 겁나고 불편하십니까?
하나님의 안수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그는 소리쳤다. (욥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피해야 할 성가시고 수다스런 이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수하셨다”는 것은 여기서 임직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수는 안전보장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에 안수합니다. 우리의 길을 지켜 주십니다. 그의 손이 우리 인생길에 보디가드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전후좌우를 살피기 때문에 뒤통수 맞을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대통령의 경호보다 완벽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대통령보다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손은 능력을 나타냅니다. (출33:22-23)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손이 모세를 덮었기 때문에 바로와 그 군대들이 모세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과 그 군대가 다윗을 죽이지 못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어떻게 수천 명을 동원해서도 그렇게 번번이 다윗을 놓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안수하심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고상한 지식의 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비밀이 풀어질 때에 주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여행할 때나, 엄청난 문제, 중요한 문제에 하나님의 안수하심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든든한 평안을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늘 가까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
7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다윗에게도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 앞을 피하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과 하나님 앞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과의 미묘한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범죄 한 아담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었던 본성은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 속에 유전으로 강하게 전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 친근한 죄악 속에 적당히 엔조이 하려는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생애에도 밧세바를 연모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우리야를 죽게 했던 범죄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8절)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 다윗은 구약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보좌 우편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도 땅의 정욕 때문에 지옥 같은 죄책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찬란한 행복을 맛보다가도 고난이 낙치고 낙심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고 한순간 깊은 나락으로 던져진 것 같습니다. 우리 생애가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습니까?
9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이봉주 선수가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어보았습니다. 지옥훈련이 너무나 힘들어 죽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바다 끝까지 도망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쫓기는 일생이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한심하고 처량해서 ‘내게 날개가 있다면,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는 저 바다 끝에 가서 살수만 있다면’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늘과 음부에 돗자리 깔아도, 어둠 가운데 숨어도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손은 그곳에서도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양심을 거드리십니다. 양심의 가책, 죄책이 우리의 숨통을 조입니다.
(11.12절)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이 말은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때 사용한 말입니다.
(13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들었나이다.” 마지막으로 더 깊은 곳으로 도망을 합니다. 다윗은 마침내 어머니의 태속까지 도망합니다. 어머니의 태속으로까지 들어가지만, 그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고꾸라집니다. 하나님이 이미 태속에서 나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삶에 불현 듯 덮치는 어둠의 순간이 있습니다. 실제로 감당하기 어려울 시련을 당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병이 들고 점점 상황이 나빠져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방을 더듬거려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둡고 막막한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지나고 보니 주님 앞에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깜깜한 어둠인줄 알았는데 주님 안에서는 어둠이 결코 우리를 삼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끝이 없을 것 같던 십년 동안의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만일 다윗을 덮었던 어둠이 정말 어둠이었다면 다윗왕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는 이민생활에서 이런 경험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 그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번에 취업전문 포탈업체에서 청년세대 288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이 결혼을 안하겠다가 아니라 포기했다고 한 것입니다. 내 집 마련, 출산, 연애도 포기했다는 응답이 각각 50%선에 가까웠습니다. 결혼을 포기한 이유 1위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였습니다.
우리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가난했지만, 결혼을 못하리라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생각하고 누구나 결혼을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 없어도 결혼했습니다. 또 결혼해서 살다보면 당연히 자식도 낳고, 내 집도 언젠가는 마련되는 줄 알았지 지금처럼 시작도 못하고 현실에 발목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삶의 어두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어둠은 별것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안수하십니다. 빛의 자녀는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다닐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묘하신 창조(14-21)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추적하며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이유를 창조에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만드셨겠는가? 창조의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를 지으신 것이고 그래서 나를 그 목적대로 인도하십니다.다윗은 기이하고 완벽하게 자신을 조직하신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그 선하신 목적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의 과학자인 쳄버스란 무신론자는 한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자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딸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은 딸의 정교하고도 복잡한 귀의 형태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는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것 같이, 원자들의 충돌에 의해 우연히 진화되어 만들어졌다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건 분명히 설계하고 만든 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그는 당황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귀는 음파를 수집해서 고막에 전달합니다. 음파는 고막을 진동시키는 데, 고막은 10억분의 1센티미터 정도로 흔드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진동이 내이에 있는 체액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리고 신경자극으로 전환되어 뇌로 전달하고 뇌는 다양한 음파를 구분해서 사람소리, 음악소리, 동물소리를 구분해서 인식해 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를 압니다. 심지어 전화소리를 듣고서도 상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육체를 신비하게 만든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벌써 주의 눈이 보셨고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만 우주처럼 기묘하게 조직하고 짜맞추신 게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도 하나님께서 설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아로 잉태되어 아직 한 날도 되기 전에 하나님의 전지하신 직관으로 장차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를 다 책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계획하셨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아멘 아멘하시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과 또 후에 교회를 세울 인물이 될 것을 아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직관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바울도 그래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부인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관은 장차 우리가 몇 살에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결혼상대를 선택하고, 어떤 직장을 갖고,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것이고, 언제 어떤 병에 걸릴 것이고, 이것을 다 아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책에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수
17절) “주의 생각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 우리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정말 우리도 그런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절망적인 상황 때 마다 하나님이 내 놓으신 기가 막힌 카드로 위기를 벗어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매일 매순간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에 맞춰 기묘하게 움직이는 하나님의 계획은 바다의 모래보다 많아 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어떤 잘못된 선택을 하던 하나님은 복구 프로그램을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다만 우리의 선택에 죄가 개입할 경우, 그 복구의 과정에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백보좌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나를 조성하시고, 늘 안수하시며, 꼼꼼하게 삶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왕이신 예수, 재판장이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금주의 영상설교듣기
아가페선교교회(담임: 강진구 목사)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치료하고 회복하는 교회!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
주일예배: 오전 11시, 수요예배: 오후 8시, 금요예배: 오후 8시
주소: 11575 Jones Bridge Rd, Alpharetta GA 30022
TEL: 678-462-7526
이메일: agatopia5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