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7
요한복음 13장 / 본의 행렬
사도 요한은 7이란 숫자를 마음껏 사용한다. 사도 요한인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7이란 숫자로 가득차 있다. 요한복음에는 7 표적과 7 자기 선언이 나온다. 성경에서 7이란 완전 숫자이다. 7 속에 모든 것을 담았다. 그리고 또한 마무리 숫자이다. 1번째 표적인 가나혼인잔치에서 보여준 의미는 변화였다. 그리고 7번째 표적인 나사로 사건에서 변화의 내용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알려줌으로 표적을 마무리 한다. 7 자기선언에 있어서도 1번째 자기선언에서 생명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7번째 자기선언에서 생명은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주어진다고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7가지 표적과 7가지 자기선언은 그것들이 하고 싶은 말씀을 향하여 있다. 7가지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8번째 표적을 향하고 있다. 7가지 매 사건에서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8번째 표적이다. 7가지 표적에서 보인 이적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8번째 표적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경이로움의 표현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8번째 표적에서 죄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8이란 숫자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7가지 자기선언은 ‘내가 왕이다’라는 8번째 자기선언으로 귀결된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다
이제 8번째 표적이 일어날 때가 되었다. 그것은 12장에서 예수님을 잡을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으면서 8번째 표적은 예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8번째 표적은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흥미로운 표현은 ‘자기 사람들’이다. 17장에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로 표현되고 있다. 요한복음 3:16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곧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런데 자기 사람이라니?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영생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는 자들이 바로 자기 사람 곧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의 표본들이다.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게 될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나누는 마지막 만찬의 자리를 떠나게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였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곧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다. 요한복음은 20:31에서 “너희로 믿고 그(예수) 이름을 힘입어(안에서) 영생을 얻게 함이니라”고 말씀한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마태복음 1:21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러한 동기는 사랑이었다.
이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선생된 자로서 제자의 발을 씻는 사례를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막지역이 많았고 그래서 실내로 들어갈 때는 특히 식사를 하고자 할 때는 발을 씻어야 했다. 당연히 손도 씻어야 했고... 그러나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야 했다. 이는 종들의 일이었고 제자들이 선생에게 해야 할 일이었다. 당황한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자 예수님을 발을 씻기우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지 베드로는 아예 자신의 온 몸을 씻기어 달라고 한다. 여기에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알지만 당시의 제자들은 더 당황할 뿐이었을 것이다. 이는 또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14장과 16장에서 성령 하나님을 거론하신 이유다.
목욕한 자란 이미 구원받은 자란 의미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라도 발은 씻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라도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한다. 자복이 필요하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면 문제다. 그러면 6일 동안 잘못하고 주일에 잘못을 자복하기만 하면 다인가? 그래서 성경은 참으로 빈틈이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다시는 이 죄를 범치 말라” 건조한 회개나 자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자복이 있어야 한다.
당시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오순절 성령님이 임하자 그때서야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어리둥절해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후에는 알리라”
내가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승천이후에 제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이다. 그 사명은 21장에서 밝히신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 예수님이 3년 반을 제자들을 양육하신 것처럼 이제는 제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냥 열심히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접근하는 삶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구약에도 주어진 말씀이고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히 하는 계명이다. 그리고 듣는 자들에게는 익숙한데도 새롭게 들리는 계명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주어지자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문자로 보이는 율법 지키기에만 몰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에 접근해 가시는 방식은 달랐다. 그것은 사랑으로 접근해 가는 방식이었다.
사랑이란 물과 같이 흘러가는 특성을 가진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했음으로 사랑을 자기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갚는 방식이라고 하신다.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베드로 마음대로 하며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남이 베드로를 끌고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상대방에게 접근해 갈 것인가? 사랑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방식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대로 제자들도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며 제자들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사랑의 본을 보였다.
그렇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어주면서 말씀하신 것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은 보였노라.”(13:16) 이는 예수님이 세족식을 만들어내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방식이었다. 상대방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로 향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 방식이었다.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사람이 되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심은 사랑함이었다. 선생이라도 종의 자리에서 사랑하라. 종은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일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 이 길이 바로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었고 그렇게 서로 사랑함에 본을 보이라고 명하신다. 이러한 자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다. 예수님의 사람이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본의 행렬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행위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있음을 암시하였음에도 가롯 유다는 상관치 않고 그 일을 행하기 위해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도 함께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이런 가롯 유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선생이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긴 장면만 남았다. 그리고 떠났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듣지도 못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