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마 23:37-39)
1.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37-38)
암탉(Hen)이 가진 날개로 병아리들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마 23:37)라고 하셨다. 체온으로 날개 아래 있는 새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암 닭의 모습은 강렬하고 순전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날개(wing)는 새나 곤충 따위의 몸에 붙어서 날 수 있게 하는 기관을 말한다. 하나님은 날개 있는 모든 새를 종류대로 창조하셨다(창 1:21). 하나님은 속죄소를 덮는 그룹에 날개를 만들었고 이 날개들을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도록 했다(출 25:20). 그리고 에스겔은 환상 중에 네 날개가 있는 생물을 보았다(겔 1:6).
날개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 영적인 힘 등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날개 위에 새끼를 업는 것같이 하셨고(신 32:11),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를 받으러 왔다고 표현하며 룻을 축복하였다(룻 2:12).
시편 기자는 주님의 날개 그늘을 가장 친밀하고 은밀한 교제의 영역으로 표현했다(시 17:8). 이사야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고(사 40:31),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면서 바람이 그 날개로 이스라엘을 쌌다고 표현하였다(호 4:19).
여기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유대인)을 향하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하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하셨다(마 23:37).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애정이 넘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2.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고 하였다. 기회를 놓쳐버린 자들의 운명을 예고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황폐하게 되어버렸고, 그 후 2천년 동안 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황폐(Desolate)란 버려두어서 거칠어지고 못 쓰게 된 것을 말한다. 애굽에 가뭄이 닥쳤을 때 요셉에게 와서 종자(鐘子)를 구하던 애굽인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식물을 준다면 자신들의 전지가 황폐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창 47:19).
일반적으로 황폐하다는 말은 예루살렘(사 64:10)이나 유다 성읍(렘 9:11), 모압(렘 48:15), 보스라(렘 49:13), 아스글론(습 2:4), 대로(사 33:8), 제단(겔 6:6) 등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결과를 묘사하면서 참혹하고 버려진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3. '찬송하리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9)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앞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여기서는 '이제부터는 너희는 찬송하리라' 그리고 계속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중간에 끼여 있는 '너희는 찬송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찬송이 무엇을 찬송한다는 말인가? 주석가들은 일반적인 해석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하실 때 불렀던 찬송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도 그렇게 찬송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게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봐서 별로 공감이 안된다. 재림 때의 찬송으로 본다면 문맥의 흐름에 맞지 않고 하필이면 이곳에 끼워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표준 새 번역 성경에는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못 볼 것이다'라고 해서 '찬송 할 자'란 말을 빼고 번역을 했다.
그러나 원어의 표현으로 율로게메노스 즉 '찬송하리로다' 가 들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찬송은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고 그의 비참한 죽음을 본 유대인들이 승리의 축배를 들면서 부른 찬송으로 보는 것이 문맥의 흐름에 적합하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을 재림의 날에나 보게 될 미래적인 것을 언급하신 말씀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