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궁금한 것들이 많습니다. 장로님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는지 먼저 말씀해주세요.
저나
저의 처가나 모두 3대째 예수를 믿고 있어요. 할아버님, 아버님 그리고 저를 거쳐 아이들과 손주들이 믿고 있구요. 저의 아버님은
장로님으로 교직에 계셨고, 장인께서는 일본에서 복음을 접하시고, 신학을 마친 뒤 개척교회를 하셨어요. 만주 길림성에서도
목회하시다가 해방이 되어 한국에 가셨지만 공산정권 때문에 46년에 남하하셨지요. 53년에 순복음교단인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설립한
4분 중의 한분으로 곽봉조 목사님이십니다.
장로님은 미국에 유학으로 오셨지요?
68년
8월에 미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떠나기 두 달전에 아내를 만났어요. 첫 눈에 반해 만난지 두 달만에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혼자 미국으로 들어가버리면 영영 못만날 것 같아 학교에 1년간 연기를 허락받고 71년 9월에 미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학생으로 왔고, 집사람은 간호원으로 오게 되었지요.
공부는 어디서 하셨어요?
Le
Noir-Rhyne 대학에서 풀 스칼라십을 받으며 공부했는데 당시에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한국에서 내보내주지도
않았어요. 아팔라치안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아내는 병원에서 일했는데 대학교,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감사하게도 돈은 안들이고
공부했습니다. 74년 졸업하고 이후 산업체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당시 최태식 목사님이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우리를 두 번씩 방문하셔서 교회를 같이 시작하자고 하세요. 그래서 1년 9개월 동안 왕복 6시간 거리의 교회를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그 교회가 올해로 벌써 창립 40주년을 맞았습니다.
폭설이 왔던 어느 날,
스노우 타이어를 달고 5시간이 걸려 교회로 갔더니 교회 성도가 한 명도 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어요. 그날 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앞길 눈을 치우고 있는데 미국 본 교회의 목사님이 마침 오셔서 눈이 오는데 장시간을 어떻게 먼길을 왔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예배를 빠져본 적이 없다. 이거 뭐 별일 아니다”라고 했더니 이분이 감명을 받았는지 그
다음부터 우리 교회로부터 렌트비를 받지 않는 일도 있었어요. 당시 성도수가 130명 내외였는데 장로를 세우는데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가 뽑히게 되었어요. 그렇게 1980년 6월, 35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로 임직을 받고, 이후에 교회가 교단을 바꾸면서 장로시험을 다시 보기도 하면서, 노스캐롤라이나의 제1호 장로가 되었습니다.
CPA로서 회사를 꾸려가기에도 바쁘셨을텐데 도서관은 어떤 동기로 세우시게 되었어요?
1985년도에
도서관을 오픈했는데 도서관을 열게 된 것은 아버님의 영향때문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밥을 주지
않았어요. 1년에 80권 정도는 책을 읽어야만 되었어요. 조금 더 크니까 아버님이 80권에서 100권으로 권수를 올립디다.
100권은 굉장히 어려웠어요. 주일에는 책을 보게 하시진 않았으나, 학교 공부도 해야했고 아버님이 읽으라는 책도 읽어야만
했었어요. 다른 애들은 나가 노는데 우리는 나가 놀지를 못했어요. 책을 안읽으면 매로 다스리셨던 엄한 분이셨거든요. 그렇게
자랐는데 미국와서 공부할 책만 읽으니까 쉽더라구요. 그러다 일년 후에 뉴욕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한국 서점에 들려 한국
책들을 보니까 아버님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우리 아버님이 엄하시긴 했어도 정말 좋은 아버님이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도 아이를 키우다보니 시간에 쪼들려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얘기할 시간도 없는데 아버님은 저녁 때마다 우리들에게
‘그 책에 뭐라고 써있더냐, 무엇을 느꼈느냐’라고 물으셨거든요.
그날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책방 한 귀퉁이에서
울다가 돌아와 아버님께 19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답신이 몇 장이었는지 아세요? 딱 3줄이었어요.(웃음) ‘책이
너에게 감동도 주지만 그것보다 책을 통해 5백년 전의 사람도, 2천년 전의 사람도, 머나먼 아프리카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너의 인생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주니 얼마나 좋으냐’ 이런 내용이었지요.
아버님께 보낸 편지에 이민자들은 미국으로 올 때 책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네가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어 보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전 식구가 모은 책이 6만 8천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도서실을 열게 되었죠. 그때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샬롯 옵져버 신문에서
‘민주주의 영웅상’을 주는 등 도서관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하루는 베트남 목사님이 찾아와 왜 자기네 나라의 책은 없냐고
그래요. 이후 1만 3천여권의 책을 사다가 들여놓고 지금은 그들의 책이 가장 많아졌습니다. 현재는 13만 2천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천 여명이 다녀가니까 각 나라 커뮤니티 센터의 역할도 톡톡히 하는 셈이지요.
샬롯(N.C}다운타운에 위치한 CHUN GROUP 1층에 마련된 아시안도서관, 12만권이 넘는 책들이 소장되어있다.
샬롯(N.C}다운타운에 위치한 CHUN GROUP 2층 사무실에도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있다.
Chun University에 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려요.
저는 복음성가보다 찬송가 부르기를 좋아해요. 찬송가를 부를 때 어머니, 할머니 생각이 나요. 할아버님이 저를 안고 찬송가를 부르셨던 기억이 아련하게 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하신 것도 기억이 나요.
주일에
예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곡을 불러야 하는데 요즘은 세태가 많아 변한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에 마침 우리
교회에 이영기 교수님이 오셨어요. NYU에서 Ph. D를 받으셨고, 계명대학에서 30년이 넘는 교수생활을 하신 분인데 이분과 같이
학교를 하게 된 것이죠. 그때까지 샬롯에는 메시야 공연도 없었구요. 교회 음악을 위해, 올바른 찬양 사역자를 위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에게 100 퍼센트 장학금을 주는 학교로 커가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키셨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어떤 교육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셨는지 설명해주세요.
두
딸과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리나, 리사, 대니엘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우리를 키울 때 다른 집처럼 ‘리더가 되라’고
키우시지 않고 ‘남들 위해 살자’고 하셔서 이웃들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저도 미국에 와서 아이들을 키울 때 ‘Live
for others’(남들을 위해 살라)를 강조하면서 키웠어요. 남들을 위해 사는 사람의 인생이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의 인생이 풍부해진다고 가르쳐 왔죠. 그러면 남들을 위해 살 수 있는 대표적인 직업이 무엇인가 보니 의사와 변호사가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되었어요.
아이들이 12살이 되면 앞으로 자라서 무엇이 될 것인지를 써내게
했는데 모두 ‘변호사’라고 써냅디다. 그렇게 목적이 일찍 정해지면 다른 아이들보다 4배의 빠른 성취가 있다고 해요. 그리고 아이들
모두 변호사가 되었구요. 국제변호사를 하겠다는 막내는 중국어를 배우게 해서 현재 영어 다음으로 중국어를 편하게 합니다. 둘째가
유펜 재학시 인턴십을 할 때, 11만불과 4만 8천불을 오퍼하는 로펌이 있었는데 두번째 로펌으로 가더군요. 남을 도울 수 있는
곳이 그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이들 모두 튼튼한 크리스천인 것이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하며, 그 행함에는 성수주일과 십일조 생활이 가장 기본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강조 했습니다.
저도
3대 독자로 금요일에 태어났는데 그 주일에 우리 어머님이 저를 데리고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예배에 참석하셨대요. 옛날 어르신들
생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갓난 아기로 예배에 참석한 이후 저는 주일 성수를 어긴 적이 없던거죠.
한
번은 주일에 타주에 살고 있는 큰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병원에 있대요. 심하게 체해서 친구들이 병원에 데리고 와서 입원을 시킨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리나야, 그게 죽을 병은 아니지? 네가 일생동안 단 한번도 예배를 빠지지 않았는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라”하고 얘기했어요. 놀랍게 딸도 “가볼께요.”하는 거 있죠. 의사로부터 어렵게 허락은 받았는데 친구가 너희 아버지
광신자라며 비난하더래요. 그날 큰 딸은 뉴욕의 리디머 교회에 참석했다가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곽선신: 저는
아이들의 기독교적인 교육은 집에서부터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 때문에 교회에서 동시통역을 하다가 부족함이 느껴져 기독교
교육학을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게 된 것이 89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무보수
교육 전도사이지만 보수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통해 넘치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게
보상해주신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큰 딸은 제가 너무 엄하게 키워서 아버지 같은 사람 싫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할 때 아빠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합디다. 저에겐 충격이었죠. 아이들 앞에서 잘못한 것을 바로 시인하되, 우기지
않고, 위선을 보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던 것이 아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이 참 부럽습니다. 자녀들 역시 신앙을 물려주는 부모들이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이윤태 발행인: 정리 한상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