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1)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이르시다 (마태 24;1-2)
본 24장과 25장의 내용은 대부분 마지막 날에 대한 기사들로 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24장은 종말의 징조에 대한 예언을 하시고, 25장은 종말의 일들을 비유들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또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시면서 무척이나 서글프고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질문에 성전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하신 것이다. 1. 성전의 마지막 모습(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 뜨리우리라"(1-2) 성전(Temple)은 신성한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실 장소’로서 특별한 곳을 선택하겠다고 약속하셨고(신 12:11) 오직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신 12:13-14). 바로 그곳이 구약에서의 성전이다. 한편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전에서 예배자들과 만나기를 선택하셨고(대하 6-7장) 이제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신자의 안에 거하심을 말한다(고전 6:18-20). 이 성전이야기는 쉽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름은 달랐을 지라도 무려 2 쳔 년 동안이나 성전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어온 역사성이 있는 건물로서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의식가운데 깊이 뿌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으로 판단해야 하느냐 아니면 전통적 유전, 즉 역사성으로 판단해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먼저 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따라서 기독교는 종교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이냐 하는 문제와도 직접 연관을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결정적 이유가 바로 성전을 헐어버리기 위한 것이었다(요 2:19). 이것을 먼저 인식을 하고 다음에 나오는 글들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유는 교회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록으로만 알고 있는 성전일지라도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우리 의식 속에 쌓여 추억들로 남아있는 곳이다. 이때의 성전은 B.C 19년에 착공하고, A.D 63년에 완공 되었다하니 무려 80년이 넘은 것이고, 예수님 당시는 46년 되었다 했으니(요 2;20) 한창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을 걸려서 건축된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하신 대로 A.D 70년에 로마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 되면서 불과 완공되어 십년도 못 넘기고 파멸을 맞는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이었다.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란 말씀의 성취를 위한 것일까? 성전 터에는 '알 아크사'라는 이슬람 사원이 지금으로부터 약 1,700여 년 전에 지어져 있어, 지금은 재건도 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재검토해야 할 성전문제, 즉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본래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짓지 말라'고 하셨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짓지 말라'(대상 17;4)고 하셨던 것이다. 2. 다윗에게 왜 예루살렘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셨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은 다윗이 전쟁을 많이 했음으로 피를 많이 흘려서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신 것이라고 생각 해왔다(대상 28;3)고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다른데 있다는 것이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내가 이스라엘을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역상 17;4-6)라고 하셨다. 그리고 '네 생명의 수한이 차서 네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대상 17;11-12)고 하신 말씀을 오해한 데에서 만들어 진 오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분들 중에는 생각 밖의 내용이라고 놀랄지도 모른다. '너는 짓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몸에서 날자가 내 집을 건축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다윗은 '네 몸에서 태어날 아들을 솔로몬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을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남겨서 최초의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어진 것이다. 다윗은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짓지 말라고 한 말씀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해서 자기는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짓지 말라(대상 28;3)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성전 짓는 것은 자기의 아들 솔로몬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3. 다윗의 몸에서 날 아들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이 성전건축과 관계된 말씀을 전달 받은 메시지에서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 (1)하나는 짓지 말라는 것과 (2)다른 하나는 '네 몸에서 날 자'가 지을 것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내용은 다윗의 몸에서 날 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다윗은 이 말씀을 솔로몬으로 이해를 했다. 물론 그 당시 다윗으로는 솔로몬 그 이상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신약시대에 와있는 우리의 생각은 다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왜 검토하고 다루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다윗의 몸에서 날 자'가 솔로몬만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 당시에 나단선지를 통해서 다윗에게 전달된 멧시지 가운데 '네 몸에서 날 자'에 대한 것만 아니고 '그에게 왕권을 견고케 할 것이요.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란 말씀이 포함된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권과 그 나라가 영원히 견고한 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다른 것들도 그런 것처럼 상징성을 가진 약속일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인 것으로만 넘길 수 없는 것은 다윗 당시에 메시지가 담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서 감추어진 부분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속성과도 전혀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재검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결코 이 문제는 그때 일로만 끝 난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살펴보려는 것이고 또한 이 문제는 미래교회의 새로운 페러다임(Paradigm-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을 창출하는 데도 절대적 영향이 되어지기 때문에 재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윗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는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속성과도 합하게 되고, 또한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험난했던 역사의 모순도 후에라도 재평가가 돨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의식전환에도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신앙의 본질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4. 다윗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사람들이 어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다윗의 자손을 통한 하나님 접 건축이 만약에 다윗의 자손을 그리스도로 본다면 하나님의 집인 성전의 개념도 바뀌어 질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과 관계된 말씀을 몇 곳에 더 찾아보면서 결론을 내리면 좋겠다. 먼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후에 그의 헌당식에서 드리는 내용가운데 예루살렘 성전과 관계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 하섰사오나,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대하 6;1-2) 라고 했는데 이 말씀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하신 곳은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성전 문제를 풀어나가는데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캄캄한 곳이 어디냐'라는데 있다.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구름 속'이라고 해석들을 하고 있다. 그것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항상 하나님은 흑암의 빽빽한 구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출 19;9, 시 18;11-12).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캄캄한 곳'은 성막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을 하고자 한다. 이유는 그래야만 성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막의 기록을 살펴보면 모두 준비를 하고 맨 마지막에 윗덮개를 3증으로 덮었는데, 첫 번 것은 염소 털로 덮었고, 두 번째는 숫양의 가죽으로 덮었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도록 했다는 것이다(출 26;7,16절 참고). 그래서 성막안은 항상 캄캄하기 때문에 촛불을 항상 켜 놓아야 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겠다는 것이었는데 솔로몬이 내가 주를 위하야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하고 헌당에 대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또한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전달했는데, 왜 짓지 말라고 하셨는가? 에 대한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내가 이스라엘을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대상 17;4-6) 왜 짓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자기의 백성들과 더불어 활동하셔야 했기 때문에 항상 장막에 거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하고 또한 '이 장막, 저 장막, 이 성막, 저 성막'이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한 곳에 머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한곳에만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하신 뜻에 담겨진 깊은 의미가 가시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인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네 몸에서 날 자(者)'라는 말씀을 솔로몬으로 규정한다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된 성전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데 서로 어그러져서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6). 솔로몬의 왕국이 영원히 보존되고 또한 솔로몬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했는가를 생각해 볼 때 말씀의 내용이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사건을 그림자로 보더라고 신약에 와서는 성전문제는 분명해져야 한다. 여기서 구약이나 신약이든지 그리스도를 통한 신령한 성전에 초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행 7;47-50) 그리스도로 신령한 성전을 말씀히신 것으로 이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가르킨(요 2;20)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해답이 나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고전 3;16)이라고 하신 말씀과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한 내용가운데 '그 안에서 성전이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가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고 하신 말씀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성전 된 사람들로 연결되어 지어져가는 신령한 성전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성전이란 의미가 손으로 지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에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 진다. 너무나 오랜 전통으로 쇄뇌된 사고가 쉽게 포기 될 수는 없겠지만 교회와 종교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지금이라도 신령한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신령한 성전건설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일에 오히려 힘을 쏟아 부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하실 집 하나를 못 지켜서 이방인들이 성전을 헐고 불태우고 다시 짓지 못하도록 가증한 알라 신전을 세우도록 한 것에, 왜 하나님은 보시고만 계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볼 때가 아닌가? 심지어 신약시대 교회당 즉 예배당을 건축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면서 소위 성전 건축헌금이란 명목을 말하면서 건물을 건축하는 일 보다는 21세기 교회는 새로운 페러다임(paradgim)을 만들어 내는 일에 관심들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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