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마태복음 24장(2) 재난의 징조들-(3) 가장 큰 환난-이응주 목사

by wgma posted Sep 21, 2017 Views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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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2) 재난의 징조들

재난의 징조들

(마태 24;3-14)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다. 성전에 나오실 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 하신 말씀이 궁금한 제자들이 조용한 곳에 이르렀을 때 질문하게 된다.

1. 제자들의 질문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감람산(Mount of Olives)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해발 841m의 산이다. 이 산은 감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감람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구약에서 감람산은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삼하 15:30), 스가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할 때(슥 14:4) 언급되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관련되어서 자주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눅 19:37), 세상 종말에 대해 가르치심(마 24:3), 낮에 가르치시고 밤에 쉬심(눅 21:37),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잡히심(마 26:30, 36; 막 14:26, 32; 눅 22:39)과 승천(행 1:9-12) 등이 일어난 장소였다.

감람산에 무덤이 많은 이유는 약 2,000여 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무덤부터 최근의 무덤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덤이 있다. 유대인들은 심판의 주님이 감람산에 오실 것으로 믿어(슥 14:4) 자신이 죽으면 감람산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 중에서는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예루살렘으로 와서 임종을 맞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기드론 골짜기를 경계로 예루살렘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감람산에는 회교도들의 묘지가 있다. 훗날 메시아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의 동쪽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회교도들이 이곳에 묘지를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메시아가 오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1)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2)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

2. 예수님의 대답은

(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2)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3)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4)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4-7)

'민족(民族, Nation)'이란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나 풍습 등 문화 내용을 함께 하는 인간 집단을 말한다. 성경에는 여러 단어가 민족으로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고이’(goy), ‘암’(?m), 헬라어 ‘에트노스’(ethnos) 등이다. 보통 ‘고이’는 이스라엘 민족(창 12:2), 이스마엘 민족(창 21:18), 여러 다른 민족들(신 31:3)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 민족 외에도 백성(삼하 7:23), 열국(창 17:4), 나라(창 15:14) 등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고 하셨으며, 예수님은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마 24:14).

'기근(Famine)'이란 가뭄, 전쟁, 곤충해 또는 다른 재난으로 인해 음식이 부족한 현상이다. 팔레스타인의 농경에는 두 계절의 비, 즉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요구되었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에는 기근이 생기게 되었다. 이 외에도 우박을 동반한 폭풍은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메뚜기나 곤충들은 채소들을 먹어치웠다. 전쟁이나 침략행위 등도 기근의 원인이 되었다(신 28:51; 왕하 6:25).

가장 잘 알려진 성경의 기근은 바로의 꿈에서 예언된 것이었다(창 41:1-7). 이 꿈을 잘 해석했던 요셉은 이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가족들이 애굽으로 올 수 있는 길을 예비하게 되었다(창 41:14-43). 기근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번성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여 이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드러내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기근은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즉 백성들에 대한 경고(왕상 17:1; 겔 5:16), 잘못에 대한 책망(삼하 21:1; 렘 14:12) 등이었다. 한편 예수님도 기근을 말씀하셨는데(마 24:7; 막 13:8), 이는 종말의 징조 중의 하나였다.

성경에서 기근을 겪었던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창 12: 10), 이삭(창 26:1), 요셉(창 41-47장), 룻(룻 1:1), 다윗(삼하 21:1), 엘리야(왕상 17-18장), 엘리사(왕하 4:38; 6:24-31), 시드기야(왕하 25:2-3), 글라우디오(행 11:28)

'지진(Earthquake)'은 화산 활동이나 지각 내부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하여 지면에 균열이 일어나거나 일정 기간 동안 진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지진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왕상 19:11-12).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 방법이기도 했다(사 29:6; 겔 38:19). 아모스와 스가랴는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적고 있다(암 1:1; 슥 14:5).

5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은 종말에 있을 징조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여러 일들이 있을 때 주의하라는 경각심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고 있다. 그리고 종말의 날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종말과 세상 끝 날에 대한 종말을 복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자연재해나 전쟁재해 같은 것으로 개인의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다. 예를 들어 지진, 기근, 전쟁 등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까지 인류역사가 진행 되어 오는 동안 수없이 있었고 여러 곳에서 겪어온 사건들이다. 다만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일어나는 숫자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상의 문제들이 일어날 때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어떠한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재난들이 일어날 때 너무 지나치게 염려를 한다거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데 이럴 때 일수록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이 왕성해지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고 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쉽게 미혹 받게 된다.

둘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세상이 어지럽고 복잡 해 질 때 거짓의 무리들이 무섭게 활동을 한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혹은 주님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오신다고 하면서 각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사람들을 미혹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태 7장에 거짓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이다.

(1)거짓말을 진리처럼 가르치는 자들을 두고 한 말

(2)그들은 권능을 가지고 사람을 쉽게 미혹을 할수도 있고

(3)때로는 거짓 선지자는 양(예수님의 옷)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고,

(4)거짓 선지자 본인자신이 자기가 거짓선지자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15-23절을 참고로 읽었으면 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대부분 전통적 유전들이 거짓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의 활동은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거짓 선자자의 활동이 멈출때는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을 위한 전쟁이 끝나고, 계시록 19장 마지막을 끝으로 거짓선지자의 활동이 끝났다가 무저갱에서 올라온 사탄으로 말미암아 백보좌 심판 직전에서 다시 한바탕 미혹의 활동을 한다.

세 번째는 이러한 혼란한 상황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10-)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것이 문제다.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데 믿음이 분명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번에 후꾸시마지역에 지진과 쓰나미로 피난한 사역자들이 있었다. 사역지에 교인들을 남기고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떠난 일들을 통해서 거짓된 선지자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가운데 반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1)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8-)

'재난(Misfortune)'이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쓰였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의 여러 징조들을 말씀하시고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마 24:8; 막 13:8)고 하셨는데 여기서 재난은 헬라어 ‘오딘’(odin)으로 특별히 해산의 고통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저희(악인)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시 141:5)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서 ‘재난’은 악인의 ‘악행’(RSV)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인은 악인이 악행을 행하더라도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전도서 5:14의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라는 말에서 재난은 천재나 인재(도적과 같은) 그리고 시대적인 재난 등을 가리키며 이 구절은 재물의 허무함을 말해준다. 예레미야 49:8에 나오는 ‘에서의 재난’은 ‘에돔의 재난’을 뜻하는 것이며 예레미야 18:17의 ‘그들의 재난의 날’은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받는 날’을 의미한다.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재난이 미칠까봐 두려워서였는데(창 42:4. 38) 여기서 재난은 사건이나 사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표준 새 번역에서는 ‘변’(變)으로 번역했다.

(2)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9-1)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9-2)

'환난(Distress)'이란 근심과 재난을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차르’(tsar)로 ‘좁은, 압착된’이라는 뜻으로 괴로운 상황들, 즉 고통, 고민, 환난의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신 4:30; 욥 15:24; 시 32:7; 사 63: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을 청종할 것이라고 하셨다(신 4:30).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무후무할 정도로 환난이 극심할 것이고 그 징조로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21, 29; 단 12:1).

한편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된 후 루스드라로 돌아가서 그의 동역 자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거하라고 격려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권면하였다(행 14:22). 또한 요한은 밧모 섬에서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였다(계 1:9).

환난의 이유들에 대한 성경에 나타난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인해 생기는 것,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다가 불신자들에게 억압을 받는 것 등이다.

(3)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10)

'미움(Hate)'이란 싫어하는 마음을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신아’(sin?h;삼하 13:15; 잠 10:12), ‘토에바’(to ?bah ; 출 8:26; 잠 11:20), 헬라어로는 ‘브델뤼그마’(bdelygma;눅 16:15) 등을 포함하여 20가지 정도의 단어가 미움 혹은 미워하다는 말로 번역되었다. 보통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의지적인 면에 강조되어 쓰였다. 즉 미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의지적으로 거부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는 것과 관련시켜 보면 이 뜻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섬기는 행위(신 12:31; 16:22), 교만한 눈, 거짓된 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등을 미워하신다(잠 6:16-19). 또 불법(미 3장)이나 불의한 자들이 드리는 제사(사 1:14; 암 5:21)도 미워하신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몹시 싫어하시기 때문에 거부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에 대해 잘 알려진 내용으로는 에서와 야곱에 대한 것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3; 롬 9:13)라고 하셨다. 이 경우의 ‘미워함’에는 악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칼빈 등의 학자들은 이 내용을 출생 전 하나님의 선택으로 본다. 따라서 이 말에는 형인 에서가 버림받고 아우인 야곱이 선택됨을 통해, 아브라함의 축복의 계보를 잇는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참고, 마 10:37; 요 12:25)라고 하셨다. 이는 감정적으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거절하라는 의미이다.

(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11)

'거짓(False, Lie)'이란 사실과 다른 것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거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했다(시 59:12-13; 사 28:15). 또 이 말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렘 10:14; 암 2:4; 슥 10:2).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서 예언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주 적용되었다(렘 29:9).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하였고(출 20:16; 레 19:11; 신 5:20) 거짓 고소, 거짓 증거를 경계하였다(신 19:15-21). 신약에서도 거짓은 구원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사탄에게 속한 것이라고 보아 요한은 마귀를 거짓말하는 자이며 거짓의 아비이고 살인한 자라고 하였다(요 8:44).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했다(골 3:9).

(5)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

성경에서 '불법(Lawlessness)'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욥 13:23; 겔 9:9; 14:13). 불법은 곧 죄이며(요일 3:4), 불의함,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인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불법, 곧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여 주셨다(요 8:34-36)는 의미이다. 또한 그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것을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고후 6:14).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마 7:23)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외식주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 안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다(마 23:28).

‘불법의 사람’이란 기독교 종말론에 있어서 거론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불법의 사람(살후 2:3)은 ‘멸망의 사람’(살후 2:3), ‘불법한 자’(살후 2:8) 등으로도 나타나 있다. 불법의 사람에 대한 구약적인 배경은 다니엘서의 ‘작은 뿔’(단 7:8), ‘하나님의 대항자’(단 7:25), ‘자고하는 자’(단 8:11), ‘장엄한 왕’(단 8:22-25), ‘황폐케 하는 자’(단 9:27) 등이다. 이러한 다니엘서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BC 175-163)를 말한다고 보며, 미래에 나타날 인물을 예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신약적인 배경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과 그리스도에 대립되는 ‘바알세불’(마 12:24-32), ‘가라지를 뿌리는 자’(마 13:37-39), ‘거짓 그리스도’(마 24:24), 요한계시록의 ‘짐승’(계 12-13장)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요한서신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요일 2:18, 22; 4:3; 요이 7)와도 동일한 인물로 본다.

실제로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추측해 왔다. 신약시대를 맞이한 당시의 로마 제국, 나폴레옹, 히틀러 같은 영웅들, 프랑스 혁명이나 공산주의 혁명 같은 정치적 사건, 유대교, 가현설, 로마교황 등의 종교적인 세력 등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은 불법의 사람에 대한 그림자였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종말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 후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불법의 사람이 출현하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일시적으로 활동하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연단되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의 역사가 진전되기 때문이다.

(6)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3-14) 




마태복음 24장(3) 가장 큰 환난

                                                            가장 큰 환난 
                            (마태 24;15-28)

             KakaoTalk_20170824_233314002.jpg


1. 멸망의 가증한 것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 찐저)(15) 
먼저 '다니엘(Daniel)'에 대한 역사적으로 행적을 살펴본다. 다니엘은 BC 605년 유다 왕 여호야김 때 1차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으로 왕족이나 귀족이다(단 1:3, 6). 그는 약 60여 년 간 바벨론 왕의 조언자이자 셋째 치리자, 메대 국의 총리로 일했다(단 5:29; 6:1-2). 바벨론 포로기 때 다니엘은 세 친구와 함께 바벨론식 교육을 받고 바벨론 음식을 먹어야 했으나 뜻을 정해 채식만을 했다(단 1:8-16). 
이러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학문과 재주, 명철을 주시고 이상과 꿈을 깨닫게 하셨다(단 1:17). 그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두 번이나 해석하여 세계 역사의 변천사와 느부갓네살 왕의 장래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단 2:25-45; 4:19-27). 벨사살 왕의 잔치석상에서 벽에 쓰여진 글씨를 해석하여 벨사살 왕의 교만과 우상숭배 때문에 왕위가 폐하여지고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단 5:1-5, 17-31). 그리고 그는 바벨론의 셋째 치리자가 되었다(단 5:29). 
그 후 바벨론을 정복한 메대의 왕 다리오는 다니엘을 총리로 삼았다(단 6:1-2). 그를 시기한 다른 총리와 방백들이 다리오 왕에게 왕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간청했다(단 6:3-9).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결국 이 일로 인해 사자굴에 던져졌다(단 6:10-18).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났고 오히려 그를 참소하던 사람들이 사자굴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단 6:19-27). 또한 그는 환상을 보았고 해석했는데, 그 내용은 네 짐승(단 7:1-28), 수양, 숫염소(단 8:1-27), 70이레(단 9:24-27), 왕들과 전쟁(단 11:1-45) 등에 관한 것이었다. 
다니엘에 대해 자유주의 학자들은 전설적인 인물로 취급하지만, 동시대 선지자로 알려진 에스겔이 세 번씩이나 다니엘을 언급했던 것(겔 14:14, 20; 28:3)을 볼 때, 그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 24:15)이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다니엘서 역시 다니엘의 저작임(단 12:4-5)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뒤, 바벨론의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벨론의 음식(단 1:8-16)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단 3장) 바벨론 문화에 역행하는 삶을 살았다.
(1)다니엘(히브리식)이란 뜻은 나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 
  벨드사살(바벨론식)이란 뜻 ‘벨’이 그의 생명을 보호 하실지어다.
(2)하나냐(히브리식)라는 뜻은 여호와는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고 
  사드락(바벨론식)이란 뜻은 ‘악’의 명령으로 
(3)미사엘(히브리식)이란 뜻인데 누가 하나님과 같을까?. 
  메삭(바벨론식)이란 뜻은 ‘악’ 같은 이가 어디 있을까? 
(4)아사랴(히브리식)란 뜻은 여호와가 도우셨다. 
  아벳느고(바벨론식)란 ‘느고’의 종이란 뜻이다.
여기서 '가증(Abomination, Detestation)'이란 몹시 괘씸하고 얄미운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행위(신 18:9-14; 왕상 11:5; 왕하 16:3)나 우상(왕상 15:13; 왕하 23:34; 렘 7:30)에 대해 쓰였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행위들이 신명기 18:9-14에 기록되어 있는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것, 복술, 길흉을 말하는 것, 요술하는 것, 무당 행위, 진언하는 것, 신접하는 것, 박수, 초혼하는 것 등을 가증하다고 하셨다. 또 하나님은 식용으로 부적당한 동물이나 곤충을 말씀하시며 이것들을 가증하다고 하셨다(레 11:1-47). 그리고 금지된 성적인 행위 등을 가증하다고 하시며 금지하셨다(레 18:22, 26-27). 
그렇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석자들은 보통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첫째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시킨 사건(De Wetle, Bengel, Bruce).
(2)둘째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열심당원들이 성전을 점령하고 제사를 중지시킨 행위(유대사가 Josephus는 친 로마 사람인고로 열심당원들에 대한 반감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설도 있음)
(3)셋째 B.C 168년 수리아 왕 안디오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쥬피터 신상을 세원 사건(Calvin)
그러나 주석가들의 설명들이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멸망 때의 현상을 말씀하기보다는 세상 종말의 날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본문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해석에는 때로는 복합성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위 해석들의 경우는 종말의 날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잘된 해석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단 9;27)라고 전제하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씀에 주목을 한다면 종말에 대한 설명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거룩한 곳'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보아야만 할 것이냐? 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만약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지금 말씀하고 있는 종말 현상에 대한 내용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이유는 지금 설명하는 것은 세상 끝 날에 대한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에 이미 훼파된 곳인데 이것을 어떻게 '거룩한 곳'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아야 하느냐? 라는 반문인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곳'에 대한 설명은 다른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에서 '거룩한 곳에 대한 다른 설명'을 하려면 '멸망의 가증한 것'부터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많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귀, 사탄, 짐승, 거짓 선지자 이런 말로 요약될 것이다. 여기서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거짓 선지자'이다. 
마귀나 사탄은 같은 말이고 짐승은 우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룩한 곳에 선 것이란 마귀나 사탄의 실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그것들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상이 설 수 있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아니다. 유일한 것이 가시적으로 설 수 있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교회강단에 설 수 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의 최후는 멸망인 것이다(계 20;10). 여기서 가증이란 말은 거짓 되다란 말이 포함된 말이다. 그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거짓 선지자로 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든지 양의 옷을 입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여기에서 대충 감이 잡히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거룩한 곳이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멸망의 가증한 것(거짓)이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은 섰다는 뜻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혹은 점령했다 혹은 장악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거짓선지자들이 지배하는 것을 보거든 도망하라는 것이다. 즉 깨닫게 되거든 도망하라는 말씀이다.
       
2. 화가 있으로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16)
여기서부터 좀 어려운 해석의 부분들이기에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저 마태 13장에 천국의 비유이야기에 대해서 먼저 바르게 인식을 해야 했으면 좋겠다. 마태 13장 31절 이하에 겨자씨 한 알을 심어 나무가 되매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했다. 이 말씀은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름답게 자라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나무로 자랄 때에는 새들(마귀의 새끼들)이 깃들여(점령하여) 사탄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가 그랬고(계2;9), 중세교회가 그러했고(개혁자들 중세 교회를 사탄의 회로 규정했음) 그리고 지금 종말의 날에 이르면서 기존교회는 거짓선지자들의 소굴이 될 것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에서 도망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던 땅에서 도망치라 곧 떠나라 하신 말씀이고, 신약백성은 지금까지 어디서 신앙생활의 거처를 삼고 살아왔는가? 만일 살아왔던 곳(땅)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지배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그곳에서 도망하라는 것으로 해석 할 수밖에는 없다, 어디로 산으로 가라는 것인데 산은 하나님의 품을 지칭한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거짓선지자가 지배하지 않는 곳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그곳이 산이라 는 곳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시 9;9 등/ 요즈음 성경에는 피난처, 요새, 반석 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번역하기도 했음)
2. 지붕 위에, 밭에 있는 자는?(17)
     
"지붕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17-19)
일반적으로 '지붕(Roof)'은 비, 이슬, 햇빛 등을 막기 위해 가옥 꼭대기 부분에 씌우는 덮개를 말한다. 이스라엘 가옥의 옥상은 평평하게 만들어졌으며 밖의 계단을 통해 오르도록 되어 있다. 
모세 율법은 집을 새로 지을 때는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지붕에 난간을 만들 것을 명하였으며(신 22:8), 성경에서 지붕은 담화를 나누거나(삼상 9:25), 애곡하는 장소(사 15:3), 초막절을 지낼 때 초막을 짓던 곳(느 8:16), 바알에게 예배드리는 곳(렘 32:29), 그리고 기도하는 곳이었다(행 10:9). 한편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에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눅 5:19). 
이스라엘 집들의 구조는 지붕을 옥상처럼 평평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종종 지붕에서 올라가 휴식도 취하고 담소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을 했다. 그 때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좀 이해하기 힘든 내용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들의 신앙경험을 돌이켜보면 그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섬겨왔던 교회당 교회들 혹 가증한 곳이 지배하는 장소라고 확인될 때는 살기위해서는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야 산다는 말씀이 아닐까? 밭에 있는 자에게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씀은 소돔 고모라 성의 멸망할 때 롯의 아내를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그동안 투자한 경제와 촤선을 다해서 정성을 쏟아놓은 세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미련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없는 것들이 아닌가?
'겉옷(Robe)'은 제사장이 에봇 위에 입거나(출 28:31) 보통 사람들이 겉에 입었던 옷을 말한다. 겉옷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두꺼운 망토같이 생겼으며 앞으로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활동을 할 때는 주로 벗었으나(마 24:18; 요 13:4) 예의를 갖추어야 할 자리에서는 입었다. 밤엔 겉옷을 이불로 사용했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비록 저당잡은 겉옷이라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출 22:26). 
여기서 마음 아픈 모습이 눈앞에 아롱거리는 장면이다. '아이 벤 자, 젖 먹이는 자'들은 누구일까? 단어적인 면으로 '젖먹이(Infant)'이는 젖을 먹는 갓난아이를 말한다. 예레미야는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애 4:4)라는 말로, 아기가 먹을 젖조차 내지 못하는 어머니의 젖을 통해 기근이 얼마나 심한지를 이야기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찬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을 보시고,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마 21:16)고 하셨다. 이는 시편(시 8:2)을 인용하신 것으로,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찬양한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이를 자신에게 적용하셔서 어린이들의 찬양이 구약의 성취임을 증거 하셨다. 
구채적으로 이웃, 친구, 가족들에게 전도를 목표로 마음에 품은 자들이요 젖먹이는 자는 이제 막 전도해서 교회당에 데리고 왔는데 이재 와서 그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여러분 같으면 쉽게 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화'라는 말은 미적거려서 화가 임한다 할 수도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진 자의 고민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다. 
3.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21)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는 말씀은 겨울이나 안식일은 활동이 제한된 때를 가르치는 말일 수도 있다. 겨울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활동에 불편을 느끼며, 안식일은 유대종교법칙으로 활동이 제한 받는 날이다. 그래서 이 말은 제한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서두르란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면서 '감 한다'는 말씀이 있어 조금희망을 가져본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1-) 
이 사건은 단회적인 전무후무한 한번 밖에 없는 사건이란 점에서 지구 종말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2-23).
'감한다는 뜻은 유예기간을 준다. 주님은 자기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잠시 기다리겠다. 라는 말로 생각해 본다. 택한 백성이지만 이러저런 사정이 있어서 잠시 지체될 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을 한다.

4. 주의 할 일들(23-26)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하여도 믿지 말라"(23-26)
여기서 세 가지 형태로 사람들을 미혹할 것에 대해서 주의하라고 한다. 
(1)첫째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는데 이 말은 진리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예수는 곧 진리이시기 때문이다(요 14'6). 그리고 진리는 본래 말씀으로 계셨던 것이다(요 17;17, 1;14). 또한 성령은 진리라는 것이다(요일 5;7). 즉 말씀이 있다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미혹을 받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다.
(2)둘째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택한 자라도 미혹한다는 것이다. 
(3)셋째는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혹은 골방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장소를 가르키는 말로 그동안도 수 없이 보아온 것이 특정집단들이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가르쳐 온 것을 우리는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이것이 사람을 꾀는 수단으로 쓴다. 
'골방(Side room)'이란 큰 방의 뒷쪽에 딸린 작은 방을 말한다. 구약에서 골방은 왕궁에 있는 방(왕상 6:5, 8), 성전에 있는 방(대상 23:28; 스 8:29), 신랑 신부의 신방(욜 2:16) 등으로 언급되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기도의 장소로 골방을 들어 말씀하셨는데(마 6:6), 이는 기도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진리(그리스도, 말씀, 성령)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다음 단계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유혹하고, 그리고 세 번째는 장소를 들먹이면서 유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말이 가까워 올 때는 거짓의 무리들도 발악을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미혹해서 자기들 편에 묶어 두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혹 받지 말라는 뜻으로 주님 자신이 임하시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5.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27-28)  
'번개(Lightning)'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구름 사이에서 방전된 현상으로 생긴 몹시, 빠르게 번적이는 빛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천둥을 동반한 번개는 주로 우기 때인 11월과 12월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성경에서 번개는 주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묘사(시 97:4; 겔 1:13; 계 4:5), 대적을 쳐부수는 무기(삼하 22:15; 시 18:14; 144:6),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욥 28:26; 38:25), 종말에 있을 환난의 전조(계 8:5; 16:18)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시내 산에서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었으며(출 19:16; 20:18), 사탄이 하늘의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묘사할 때에도 번개가 사용되었다(눅 10:18). 예수님은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눅 17:24) 인자의 오심도 그럴 것이라 하셨다(마 24:27 참고). 
'독수리(Eagle)'는 날개 길이가 1m가 휠씬 넘는 독수리과의 새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한 새로 분류되어 식용이 금지된 새이다(레 11:13; 신 14:12). 이 새는 하늘을 높이 날며(잠 23:5) 멀리서도 먹이를 보고 재빨리 습격하는 민첩성(삼하 1:23; 욥 9:26; 합 1:8)과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살며(욥 39:27; 렘 49:16) 시체가 있는 곳에 큰 떼를 이루어 모여 드는(욥 39:30; 마 24:28) 특성이 있다. 특별히 독수리는 그 새끼를 잘 보호하고 훈련하는 새(신 32:11)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훈련하시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인용된 새이다(출 19:4; 신 32:11-12). 왕을 상징하는 새이고(사 46:11)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다(사 40:31; 겔 1:10; 10:14; 계 4:7). 
재림의 주님은 사람들이 말하는 어느 때에, 어느 특정 장소로 오시지 않는다. 주님의 재림은 우주적인 사건으로 동에서 서편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만인이 모이게 임하신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인다는 말은 왕국 건설을 위한 마지막 전쟁에서 하늘의 군사들에게 패한 사탄 편에 섰던 자들이 죽임을 당했을때 ,새들이 찾아 올 것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다(계 19;21) 새는 마태 13장에서 네 가지 밭 이야기에서 마귀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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