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기독교와 종교-1
기독교와 종교
종교(宗敎)란 용어는 산스크리트어 Siddhanta Desana를 한역한 불교용어로 ‘근본적인 가르침’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자어 자체로는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어의 religion 역시 신과 인간을 연결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이러한 뜻풀이로만 보면 기독교도 종교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 ?
성경에서 번역된 종교라는 용어는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나는데, 사도행전 17:22과 25:19에서 등장한 단어로 ‘두려워하다’와 ‘귀신 또는 악령’이 결합된 단어인데, 영어성경 킹제임스성경은 종교라는 번역대신 미신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에서 주목할 것은 ‘두려워한다’이다.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가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죽음이란 영역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은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산다. 이에 사람들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없이하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 스펜서의 말대로 한다면 종교는 인간이 두려워서 만든 것이 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종교라 할 수 없다. 왜냐면 이들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6:5에서 번역된 ‘종교’라는 단어는 야고보서 1:26,27에서는 ‘경건(영어성경은 종교로 번역)’으로, 골로새서 2:18에서는 ‘숭배’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종교적 의식을 담고 있다. 모든 종교에는 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을 통해 어떠한 힘이나 복이 있다고 믿는다. 유대교는 율법종교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율법을 왜 하나님이 주셨는가에 대하여는 망각한 채 율법으로만 삶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 마태복음 23:23을 보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를 드린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한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라는 의식적인 행위에만 관심이 있었지 왜 하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는지의 의미는 살피지 않았다. 예수님은 의식적인 행위보다 십일조의 의미가 더 중한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행하는 것(to do)보다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to be)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독교는 타 종교와는 확연히 다르다.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의 행함이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는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특징들과 기독교를 비교하다 보면 기독교를 종교의 범주에 넣어서 같이 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기독교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볼 것이다. 그리고 문학 철학 과학 등등의 범주로 이야기할 때는 기독교도 종교의 범주에 넣어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특징을 다룰 때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구별된 특징을 타 종교와 비교하면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일단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구원의 방식에 있다. 구원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지 구원의 방식은 기독교는 종교와 구별된다. 모든 종교의 구원방식은 철저하게 행위로 인한 구원이다. 어떤 종교는 완벽한 행위 구원을 위해 윤회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는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행위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믿는다. 오직 기독교만이 인간의 문제가 죄라고 말한다.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었음을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은혜로 인한 용서와 구원. 종교와 구별 짓는 가장 큰 이유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타 종교는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기독교와 비교하여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김성철목사의 기독교와 종교 2
미신인가, 믿음인가?
[신명기 18:10-12]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한국인의 삶과 사고에 영향을 주는 종교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이다. 무속은 한국의 고유 종교라 한다면 불교와 유교는 외래 종교이다. 그러나 한국에 뿌리를 내린 세월만큼 한국인의 삶 자체가 되었다. 그런데 어떠한 종교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미신화 된다. 아마 가장 무서운 인간의 종교는 미신일 것이다.
물론 미신을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려움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하면 이는 미신에 가장 잘 어울린다. 미신(迷信)의 ‘미(迷)’는 미혹하다고 할 때의 ‘미’로, ‘길을 잃고 헤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미신이란 길을 잘못 들어서게 하는 믿음이란 의미가 된다. 쉽게 말하면 잘못된 믿음이다. 그런데 이 ‘迷’가 ‘열중하여 빠지다’의 의미도 함축적으로 가지고 있다. 잘못된 미신에 빠지면 그 잘못된 믿음을 안 믿는다 하면서도 맞을 수도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미신적 믿음은 어떤 합리적인 이유나 과학적 근거를 전혀 제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내려온 믿음이 있다. 한자권에 있는 자들은 숫자 4를 싫어한다. 왜냐면 한자로 ‘사’는 ‘죽을 死’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어떤 건물에는 4층이 없기도 하다. 불길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숫자 13만큼이나 17도 싫어하는데 왜냐면 라틴어 17은 한국의 숫자 4와 같은 의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라틴어 17은 XVII이다. 이 글자 순서를 바꾸면 VIXI이 되는데 〈나는 살았어요〉라는 뜻이다. 그래서 순서를 바꾸기 전인 XVII의 뜻은 반대로 〈난 죽었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불길한 운명
미신신앙의 근저에는 불길함이 흐르고 있다. 물가에 가면 오늘은 액운이 있으므로 가지 마라. 그런데도 가야한다면? 미신신앙은 이러한 인간의 불안함이 만들어 낸다. 이러한 불안함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의 끈과 연결된다. 사주팔자란 그것 자체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란 미신이다. 여기에 주역이 등장한다. 역이란 바꿀 역이다.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점을 치러 가거나 무당굿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불길한 운명적 미신과 연관된다. 태양이 뜨거워 우산을 쓰니까 비가 오더라.
비윤리 기복신앙
불길한 조짐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실상 복받은 인생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물론 현세적인 복이다. 인간은 누구나 복을 빈다. 미신적 불길한 운명의 실타래를 끊어낼 수만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은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미신의 믿음이 강할수록 주어지는 불길함은 복술가를 찾아 나서게 한다. 불길함을 없애고 오직 복받고자 하는 기복신앙이 깊어질수록 미신의 손길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재앙을 없애고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미신신앙이다. 미신신앙에는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길한 재앙을 없애고 원하는 대로 될 수만 있다면 윤리는 저리 가라.
오직 나를 위하여
기복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남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신신앙의 특징이다. 오직 나와 내 가족 내 집단을 위한 기복신앙이다. 내가 잘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무엇인가가, 그 누군가가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만 불길한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미신신앙이다.
기독교 믿음
기독교 믿음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위에서 말한 것과 연관하여 자신의 믿음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미신적 생각에서 교회를 다닌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염려하여 구하지 말라고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고 믿는 신앙이 기독교 믿음이다. 나를 위한 기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기독교 믿음이다. 여기에 불길한 운명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롭다. 어떤 날자나 숫자 그 무엇도 인간을 어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불길한 운명의 끈을 처음부터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관계를 중요시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알게 된 관계의 중요성은 그대로 이웃과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내 이웃과 함께하는 삶 이것이 기독교다. 미신적 생각에서 자유하라!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자유하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돌아보고 이웃의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 기독교의 삶이다.
김성철목사의 기독교와 종교 3
일치인가, 구별인가?
점점 빛나 보이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힌두교다. 힌두교란 명칭은 영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인도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인더스 강을 산스크리트어로 ‘신두(Sindhu:大河)’라고 불렀는데 신두 곧 힌두를 인도와 동일시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도인들이 부르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사나타나 다르마(Sanātana Dharma)’라고 하는데 이는 ‘영원한 다르마(법칙)’이라는 의미이다.
일치(하나됨)을 강조하는 종교
아주 흥미로운 것은 현대의 자연과학주의가 힌두이즘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지식인들은 힌두이즘 사고에 흥미를 가진다. 물론 여기에서 힌두이즘은 이렇고 저런 것이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연관이 있다면, 불교는 힌두교와 연관이 있다. 현대 자연과학주의는 진화론과 맥이 닿아 있다. 그리고 진화론적 사고가 힌두이즘의 사고와 연결된다.
진화론은 성경의 창조론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다. 우주 대폭발에서 시작했던지, 그리고 생명체는 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든지,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모든 것은 진화하는 것이며 그 태초의 근원은 같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힌두이즘의 본질과 맞물린다. 힌두이즘의 근본은 범신론이기 때문이다. 우주 자체가 신이다. 그리고 우주 안에 있는 ‘나’는 우주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 자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쉽게 말하면 우주가 나이고 내가 곧 우주이다. 우주가 신이라면 나 역시 신이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불교에서도 나타난다. 곧 내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우주 곧 신과 나의 일치. 쉽게 말하면 내가 신이 되는 것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여기에는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가 나이고 내가 나무이다. 너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 우주를 ‘1’이라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주 곧 ‘1’에서 나왔다. 많은 것이 그렇게 분화된다. 그리고 다시 ‘1’로 복귀한다. 이러한 힌두이즘 사고는 어느 종교에라도 등장한다. 기독교 신비주의에도 등장한다. ‘내가 하나님이 된다.’는 믿음이다. 자연과학주의가 힌두이즘을 만났다. 그것이 바로 신세대 운동(New Age Movement)이다. 종교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New Oder)란 내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구별(거룩)을 강조하는 기독교
일치를 강조하며 구별을 없애버리는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구별을 말한다. 이 구별을 성경은 거룩이라고 말한다. 성경이 시작하는 창세기 1:1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함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고 있다. 기독교에는 신비는 있어도 신비주의는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예수님, 이러한 것은 인간의 지식과 논리 그리고 경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신비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신비주의는 없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읽어보라. 어떨 때 ‘창조’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지. 그것은 구별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할 때, 무생물에서 처음으로 생물을 만들어 무생물과 생물을 구별할 때, 그리고 사람을 창조함으로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시켰을 때,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다르게 곧 구별되게 태어남을 말한다. 당연히 차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언어에 소질이 있고 누구는 수학을 다른 과목보다 더 잘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구별을 말한다. 구별됨을 바로 지키는 것이 거룩함의 삶이다. 사람은 당연히 원숭이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람의 사람다움을 강조한다. 기독교문화권은 각각 서로 다른 점을 발견하여 강점을 키워준다.
김성철목사의 성경지식 16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 5
예배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언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당연히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은 특별한 날을 지정하여 자신을 만나라고 명령하신다. 그 날이 안식일이다.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일이 처음 등장한 곳이 창세기 2:2-3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 번째 날에 하나님이 쉬셨다. 곧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십계명 제 4계명은 안식일에 대한 계명인데, 이 날은 누구도 일하지 말고 쉬라고 명령하고 있다. 심지어 짐승까지도 쉬라고 명령한다. 여기에 우리들의 착각이 있다. 안식일은 인간이 쉬도록 제정된 거라는 오해다. 성경은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일이지 인간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안식일은 6일 동안 안에서 스스로 알아서 쉬면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에 인간도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자유자나 종이나 누구라도 제약이 없다.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주인)이나 종이나 나이가 든 자나 어린 자나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명한다. 그러기에 짐승도 쉬라고 명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에 하나님을 만나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기억하자.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지 인간이 쉬는 날이 아님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신 날
그렇다면 알아서 하나님만 쉬시지 왜 인간을 번거롭게 하냐고? 이는 마치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후에 전시하여 사람들이 와서 보라는 것과 같다. 화가의 작품을 보면서 화가의 대단한 솜씨를 기억하는 것과 같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 주어 거룩하게 곧 구별하셨다. 다른 날과 구별하셨는데 그것은 안식일은 복이 주어진 날이다고 했다. 여기에서 ‘복’이란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다. 그런데‘예배’란 용어 역시 ‘무릎을 꿇다’이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구별하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심으로 피조물과는 전혀 다르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믿는 자들은 또한 믿지 않는 자들과 구별된다. 믿는 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왕으로 고백함으로 구별된 거룩한 자들이다. 그렇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와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는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 제정
성경의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느 특정한 날에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만나고 매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안식일을 제정하셨는가?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뒤에 안식일 제정되었음을 본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백성이 되어 있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끄는 가족의 단위가 아니라 적어도 이백만 명이 넘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변해 있었다. 개인의 말과 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이 제정된다. 매일의 삶은 개인의 삶과도 연관된다. 매일 하나님께 예배하자고 개인이 일해야 먹고 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목이 곧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을 기억하기 보다는 잊어버리기 쉽다. 여기에 안식일이 법으로 제정된다. 그것도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면서 안식일이 처음으로 등장한다(출애굽기 16장). 안식일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가운데에 안식일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으로 제정된다. 그렇게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로 구별되는 거룩한 날이 된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안식일이 자연스럽게 주일의 개념으로 바꾸어 있음을 본다. 안식일과 주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엇이 옳은가?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