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gma posted Dec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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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명 아가페선교교회
설교자 강진구 목사


의로운 태양이 떠 올라(눅 1:68-79)
2017. 12. 17 아가페선교교회 주일설교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세 가지 회색지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공허감이 있다고 합니다. 속이 텅 빈 허전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울증이 생깁니다. 둘째는 죄책감입니다.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과 쫓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양심이 아픔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셋째는 공포감입니다. 무서움과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상태입니다. 여기서 정신질환이 생기기도 합니다.나폴레옹 힐 박사는 이러한 마음의 회색지대 원인을 7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적 빈곤 문제입니다. 둘째는 치료되기 어려운 난치병을 앓을 때입니다. 셋째는 목표가 실패로 돌아갈 때입니다. 즉 사업 실패와 학교 진학 문제, 진급과 인사 문제들입니다. 넷째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입니다. 다섯째는 부모님을 모시는 갈등 문제입니다. 여섯째는 자녀 문제입니다. 일곱 번째는 기타 여러 가지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이상과 같은 문제들이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겠으나 성경적 원인을 찾는다면 영혼의 양식이 결핍되어서 오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정신적 강박관념으로 인한 마음의 병으로, 영적 문제로 고통밭습니다. 세계적으로 해마다 100만명 가까운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으며 이는 40초당 1명꼴인 셈이라고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방지협회(IASP)가 최근 밝혔습니다. 육체의 병은 수술하고 치료하면 되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인 병은 현대의학으로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방문(눅 1:68; 1:78)
(눅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visited) 속량하시며”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visited)”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사가랴의 집안을 돌아보셨습니다(visited). 68절과 78절에 ‘돌아보다’(visited)는 말이 노래의 앞뒤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경우에 쓰인 헬라어는 ‘에피스켑토마이’(visited)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나온 말이 감독(에피스패키)라는 말입니다. 감독이라는 말은 ‘지켜보는 것’이며 동시에 ‘행동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방문(심방)하시고 은총으로 다스리시고 행동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켜보시고 행동하시는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지켜보시는 것뿐만 아니라, 행동하시는 사랑입니다.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부태탕감)하시는 구원이라” 하나님의 방문은 곧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심은 곧 구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속량(redeem)되고, 부채는 완전히 탕감되었습니다. 부채가 많으면 기가 죽습니다. 무거운 빚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소망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민자의 삶이 그러합니다. 부채 중에 가장 크고 무거운 부채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단은 이 부채를 가지고 협박합니다. ‘평생 노예로 살던지 아니면, 죽음으로 갚아라.’고 합니다. 문제는 죽음 후에도 지옥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방문하시고, 모든 부채를 탕감하셨습니다. 악한 영이 죄(debt)를 가지고 억압할 때에 주저없이 되받아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맹세의 결과(눅 1:72,73)
(눅 1: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엘리사벳(하나님의 맹세)+사가랴(하나님께서 기억하심)=요한(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렇다면 사가랴의 축복송(benedictus)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감독하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ελεος)과 자비가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심이 됩니다. 여기서 긍휼(mercy)은 ‘하나님의 창자’라는 뜻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은 해산의 고통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 부모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런 아픔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은 바로 해산의 고통을 겪으십니다. 내 자식을 때리는 아픔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놀라운 희생과 고뇌가 포함된 애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 말고는 어디에도 쓰인 적이 없는 말입니다.

  

 의로운 해(눅 1:78)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visited)”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감독하시고, 방문하신 결과 아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하심으로 의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태양은 지구에서 평균거리 1억 4960만 km에 있으며, 부피는 지구의 130만 배입니다. 태양은 지구처럼 고체의 껍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전체가 거대한 고온의 기체의 덩어리입니다. 태양의 기체를 이루는 원소는 그 스펙트럼(태양스펙트럼)으로부터, 대부분이 수소 H, 다음이 헬륨 He이고, 이밖에 극히 적은 양의 나트륨 Na, 마그네슘 Mg, 철 Fe 등 지구상에서 알려진 원소 약 70종이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온도는 약 6,000C이다. 태양의 내부는 직접 관측할 수 없고, 표면의 상태로부터 이론적으로 추정한다. 현대 태양의 중심부는 온도 1500만°C이며 초고속, 초고압의 기체로 이루어졌고, 수소의 원자핵(양성자)이 충돌해서 열핵융합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에너지를 생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에너지의 기원이 됩니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방사의 형태로 받는 열에너지의 양은 얼마나 될까요?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받는 것은 그 에너지의 약 22억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구가 10일간에 받는 태양열의 에너지 양이 얼마나 되느냐 하면, 지구에 매장된 전체 석탄, 석유가 가지고 있는 열량과 거의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이용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은 직접, 간접으로 태양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수력. 풍력도 모두 태양에 유래하고, 나무. 석유. 석탄도 태양열을 저장한 것이며, 오직 조석력. 화산. 온천. 원자력 등이 직접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는 에너지 자원일 뿐입니다.
(시 84:11) “여호와는 새와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하나님이 의의 태양이십니다. 누구도 태양이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십니다. 태양도 기체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릅니다.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가랴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흑암에 거하던 백성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행하던 백성들이 빛을 보게 될 날을 이사야의 예언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장면을 지금 사가랴가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의 해가 떠올라서 흑암에 거하던 백성들에게 임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은 비추기 위함입니다. 밤이 아무리 칠 흙 같이 어두워도 해가 떠오르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어둠 속에서 별짓을 다하다가 빛이 비취므로 급하게 도망을 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의로운 태양이 더 올랐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구약시대의 사고를 가지고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메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의로운 해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이 밝아 집니다. 알라바마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로이무어가 패배하고 공화당의 텃밭인 그곳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습니다. 그가 초임검사시절 10대 소녀들을 성추행한 사건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를 속일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태양광선은 비타민 D를 생성해서 살균작용을 합니다. 광선은 본래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소독법은 햇빛소독 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 속에 앉아있던 자들이 이제는  일어납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이들의 슬픔은 주님의 위로를 받고,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가장 신나고 기뻐하는 것이 송아지(교회)입니다. 원수들을 밟가 이기게 됩니다. 교회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만물이 소생을 하고 새로운 열매가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입니다(겔 47:12)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왜 송아지가 기뻐 뛸까요? 송아지(교회의 성도)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빚을 다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송아지를 잡지 않아도 됩니다. 송아지는 교회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비참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밝히 드러나니 악한 세력, 어둠의 세력은 도망합니다.
 어둠은 춥고 더럽고 슬프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빛은 즐거움과 진실한 배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방문하심으로 의로운 해가 떠올랐습니다. 주님이 오셨으니,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배울 때에 낙심하는 사람들이 소망을 얻습니다. 슬픔에 쌓인 사람은 기쁨을 얻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임할 때에 부패한 세상은 공평의 정의,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세상의 충돌과 갈등의 문제는 결국 신뢰의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이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 만큼 서로 상처를 많이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게 되면, 영으로 영끼리 통합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평강의 길(눅 1:79)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이민 사회의 문제가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국 생활이 이전 같지 않습니다.’하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나, 소수 민족의 한계, 인종차별 같은 문제 때문에 낙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치료하는 광선입니다. 물질이 풍요한 시대에 사상이 병들고 영혼이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 59:9,10)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안개가 자욱한 길을 운전할 때나,빗길을 운전할 때에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깜깜한 속에서 방황하고 더듬거리던 자들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소경처럼 더듬었습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터지고 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치료하는 광선이 떠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어갑니다. 돋는 해는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 평강의 길은 주님이 가신 바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새 해에는 의로운 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돋는 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치료하는 광선을 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평안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절망과 한숨이 아니라, 오히려 휘파람을 불면서 찬송하며 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방황하는 저들에게 한숨 쉬는 저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안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은총(요한)입니다. 자식이 근심덩어리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속 썩이는 이 자식이 원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식을 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기억하시고(사가랴) 불쌍히 여기셔서 맹세(엘리사벳)를 실천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요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세하고 반드시 복주고 복주시기를 원합니다(히 6:13,14). 그 복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요한)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이 시대의 희망이 저들에게 있습니다.
부모가 성령 충만하면 우리 자녀들은 태속에서부터 성령충만한 법입니다. 이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키워야 합니다. Diaspoa Korean을 잘 키워야 합니다. 이들이 그릇된 길을 갈 때에 우리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자식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에 이들이 우리 부모의 뿔을 한껏 높여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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